최종편집 : 2024-04-19 09:21 (금)
[지역보물]5백년의 역사적 숨결을 느낀다
상태바
[지역보물]5백년의 역사적 숨결을 느낀다
  • 구로타임즈
  • 승인 2008.12.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8 기획취재 ] 구로지역의 보물을 찾아

글싣는 순서
1. 마을이름 유래와 이색박물관
2. 우리마을 가볼만한 문화유산 베스트
3. 우리마을 가볼만한 자연유산 베스트
4. 문화유산 관리 실태와 개선방향


구로지역 곳곳마다 전통과 문화가 숨쉬고 있다. 아주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유물부터 조선시대 중종반정 부자공신의 묘, 궁동의 유래가 된 정선옹주묘역, 500년동안 마을의 전설이 되어온 가리봉 측백나무 등이 있다.

서울의 도심 깊은 곳에서 숨어있는 수백년전의 문화유적들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알아본다.



중종반정 공신, 서울시 기념물 지정
■류순정 ▪ 류홍묘역(오류2동)

지난 2004년 서울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류순정▪ 류홍부자 묘역은 구로구 오류동 산43-1과 산43-2번지 일대에 소재해 있다. 오류2동 금강수목원아파트와 골프장사이의 큰길을 따라 150m쯤 걸어 올라가다 빌라사이 골목으로 가다보면 구로지역내 소재한 서울시문화재 2곳 중 한곳인 바로 류순정 류홍 부자묘역을 만나게 된다.

류순정과 류홍은 부자(父子)로 조선시대 중종때의 공신. 특히 류순정(1449~1512)은 당시 폭군이던 연산군을 축출하고 연산군의 동생 진성대군을 옹립해 왕(중종)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의 3대 공신중 한명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류홍은 그의 아들로 역시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이 묘역은 일등공신인 류순정이 1512년 53세에 졸(卒)하게 되자 중종이 당시 장생전의 관곽(시체를 넣는 속널과 겉널)을 내어주고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과 온수동은 물론 경기도 부천시 작동 여월동에 이르는 300여 만평의 땅을 사여하면서 조성됐다.

그러나 500년이 다 돼가는 지금은 후대로 오면서 매각 등으로 묘역이 있는 임야 8000여평으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고층아파트와 빌라 사이에 소재한 류순정 ▪ 류홍부자묘역은 서울시 유일의 부자공신 묘역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고 있다.

아파트 담 아래에 위치한 류순정의 묘역은 맨 위로 류순정의 묘와 아래로 부인인 안동권씨묘가 위치해있으며, 류순정 묘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70, 80m 떨어진 오류동 산43-31에는 맨 위로 아들인 류홍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아래로는 이후 이장되어 온 후손들의 묘 5기가 있다.

묘역내에는 16세기에 조성된 공신 묘역등 분묘8기와 문인석, 묘갈(무덤앞에 놓는 작은 비석), 망주석(무덤 양 끝에 세우는 돌기둥) 등의 석물 50여기가 있으며, 문화재사적으로 정교하고 생동감있는 조각수법등으로 조선시대 조각사연구에 의미 있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문인석등에서 나타나는 의복은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묘역 앞에 세워져있는 신도비(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가리는 비석) 비문 역시 당대 해서체의 명필인 송인의 필체가 남아있어 서예사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오류동 등 구로지역 일대에 사는 후손들은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매년 음력10월5일 오전11시에 이 곳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으며, 내년에는 명성에 걸 맞는 사당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진주류씨 문성공파 종친회 류구현 회장(73)은 밝혔다.


---------------------------------


궁동이란 마을이름 유래되어
■궁동 정선옹주 묘역(수궁동)


궁동정선옹주 묘역은 구로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와 서서울생활과학고 사이에 위치한 궁동 산1 번지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마을 이름인 궁동(宮洞)의 유래가 된 조선시대 선조의 일곱 번째 딸 정선옹주와 권대임을 비롯 7기의 안동 권씨 묘역이 자리하고 있어 향토사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알고 있는 곳이다.

정선옹주는 조선지대 선조의 일곱번째 딸로 안동권씨 권대임과 결혼,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에서 궁궐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옹주궁, 부마궁이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사라졌지만 현재 서서울정보과학고 정문 인근 자리였다고 한다.

정선옹주 묘역은 능선을 따라 7기의 묘가 남북방향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맨 위로는 궁동에 처음 자리를 잡은,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예조판서 충정공 권협의 묘와 정경부인 전주 최씨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로 바로 선조의 부마인 길성군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다. 그 밑으로 아버지인 길홍군 권신중과 전주이씨등의 묘순으로 내려간다. 부마였기에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묘순서가 바뀐 것이다.

묘역 입구와 중앙우측에는 당대 문필가인 허목 선생이 권협의 공적을 기린 신도비와 부마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공적을 기린 신도비가 있으며, 묘역마다에는 문인석등이 400년의 오랜 세월속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신비로움 마저 전해주고 있다.

이에따라 역사학자나 역사학과 학생, 풍수지리 연구가등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궁동의 북쪽 끝 와룡산을 주산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 한가운데에 금닭이 알을 품은 것처럼 자리를 잡아 명당중의 명당으로 풍수지리 관계자들로부터 끊이지 않는 관심을 끌고 있다.

궁동을 중심으로 안동권씨 집성촌이 형성돼, 현재까지 17대손이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둘째주 일요일이면 후손들이 모여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고 안동권씨 충정공파 종손인 권중호(59)씨는 설명했다.

지난 2004년에는 KBS ‘진품명품’에서 충정공 권협선생의 전신이 그려진 영정화보 2점에 대한 감정결과 각4억5천만원씩 모두 9억원의 감정을 받기도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초상화 2점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며, 이밖에 수백년된 교지와 권협선생의 반신상이 그려진 영정등은 종가에서 보관중이라고 종손 권중호씨는 설명했다.

현재 권중호씨를 비롯한 후손들은 잡목과 산악자전거동호인들의 왕래등으로 400여년된 묘역에 대한 관리와 보존이 날로 쉽지 않고 지방문화재적 가치도 높은 만큼 정선옹주묘역을 지역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활동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

한양과 인천의 관문
■ 주막거리 객사
 

▲ 주막거리 객사


예로부터 오류동은 인천에서 서울인 한양을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류동에서 쉬어 가거나, 점심을 들기도 하고 숙박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류동에는 이곳을 지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주막들이 생겨나 주막거리가 형성되기도 했던 곳.

주막거리 중에서도 지금의 오류동 120번지 일대에 청일전쟁 이전까지 청나라인들의 왕래가 잦아 고위관리가 쉬어가던 원으로 추정되는 주막거리 객사라는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도 임오군란에 관여한 관계로 청나라로 쫓겨났다가 고종 22년(1885년)에 풀려나 인천을 통해 귀국하던 중 이 객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주막거리 객사'는 팔작지붕으로 정면5칸, 측면 3칸의 안채와 행랑채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마저도 찾아볼수 없다.

현재 오류동에서 경인로변을 따라 동부제강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측으로 동네 주민이 만들어놓은 미니어처 주막만이 이곳에 주막거리객사의 역사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공간이 되고 있다.

--------------------------------------

우리지역 유일의 고인돌
■ 고척동 고인돌

오류중학교 뒷산인 고척동 산12-1번지에는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의 크기는 덮개 돌이 길이 180cm, 폭90cm이며, 굄돌은 50cm, 폭12cm 크기의 남방식 지석묘로 알려져있다.

고척동 고인돌은 지난 1998년 서울대 조사단이 처음으로 무덤방을 확인하고 일부 유물 등을 출토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후 관리나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된 채로 있다 지난 2003년 2월 1일 재발견됐다. 재발견 당시 무덤방은 이미 훼손됐으며 고인돌 뚜껑돌 등이 옮겨진 듯해 추정 고인돌로 결정됐다. 이후 2003년 3월에 세종대 하문식 교수 등의 정밀조사에 의해 고인돌로 밝혀졌다.

고척동 고인돌에 가기 위해서는 오류중학교 옆에 위치한 구청 푸른도시과 가식장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등산로나 안내 표지판이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가식장을 지나 조금 지나다 보면 하얀색 휀스에 둘러쌓인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가식장이 열릴 때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으나 가식장이 문 닫는 주말에는 관람이 어려우며, 단체관람일 경우 구청에 문의를 해야 한다고 가식장 관계자는 밝혔다.


-------------------------------------

서울시 문화재, 600년 역사
■ 함양 여씨 묘역


고척동 산 6-3번지에 위치해 있는 함양 여씨 묘역은 구로에 2개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가운데 하나로 1991년 12월 24일 지정돼 현재 개봉동에 소재한 함양여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함양 여씨 묘역에는 함양 여씨의 선조인 숭의랑공의 묘와 그 아래쪽에 부인 청송 심씨의 묘가 있다. 숭의랑공은 조선 전기 태종 때 호조좌랑(戶曹佐郞),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호조좌랑은 나라의 산업과 재산을 관리하는 자리이고 호조참판은 지금의 재정경제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숭의랑공은 세종 3년(1421)에 세상을 뜨고 7년 뒤에 이곳 고척동에 묘소를 마련했다.

묘역에는 무덤 2기, 묘비 1개, 상석(床石) 2기,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2기가 있다. 여기서 상석은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해 마련된 돌상이고 문인석과 무인석은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세우는 석상으로 문관과 무관을 상징한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함양 여씨 묘역이 중요한 이유는 숭의랑공이 중요한 인물이기이도 하지만 묘역이 조선 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 양식으로 큰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람을 위해서는 묘역을 관리하는 함양 여씨 종친회에 문의해야 한다. 현재는 고척2구역 재개발로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종친회 관계자는 고척2구역 재개발이 끝나면 구청과 협의해 재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함양 여씨 묘역은 개봉역에서 마을 버스 5번을 타고 구민센터 입구에 하차하거나 구로구청 앞에서 6613번을 타고 근린공원 앞에서 내려 걸어가면 된다.

-----------------------------------

500년 가리봉을 지켜온 ‘성수’
■ 가리봉동 측백나무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가리봉동에 터를 잡고 마을을 지켜온 나무다. 가리봉동 측백나무를 찾으려면 영일초등학교 정문에서 새마을금고를 끼고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다보면 표지판이 하나 보인다. 그 표지판을 따라서 좁은 골목사이로 들어가면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주택가에 측백나무가 홀로 서있다. 가리봉동 13-175번지에 위치한 이 측백나무는 지름 2m에 높이는 10m이다. 주택들로 빼곡이 들어서 답답한 가리봉동에 이 나무만 유일하게 하늘과 통하는 길처럼 쭉 뻗어있다.

처음에는 두 그루가 약 20m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으나 한 그루가 8·15 해방을 즈음해 태풍에 꺾여 현재는 한 그루만 외로이 서 있다. 옹이 사이사이 시멘트는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훼손하면 재앙을 내린다는 위풍당당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2003년부터 매년 10월 주민자치위원회 주관으로 측백나무제가 실시되고 있다. 올해에도 지난 10월 24일 지역사회의 관심속에 진행되기도 했다.

60대 후반의 인근 주민은 “매년 제를 지낼 때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골목밖에도 서있을 정도”라며 “올해도 많았고 보통 때는 치성을 드리러 오는 아줌마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영험한 것 같다”고 측백나무에 대한 애정의 일면을 드러낸다.

가리봉동 측백나무는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민이 뽑은 서울명소 600선'에 수록되기도 했다.





■ 기획취재팀 김경숙·송지현·황희준 기자
■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