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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우리동네이야기 7] '해방촌'으로 불리던 마을, 동진빌라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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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우리동네이야기 7] '해방촌'으로 불리던 마을, 동진빌라 부지
  • 박주환 기자
  • 승인 2014.06.16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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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내몰린 자리 변전소 들어서

'해방촌'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서울 용산구의 언덕마을을 떠올리지만 구로구 온수동에도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곳도 해방 후에 월남민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방촌'이다.

현 온수역 근처로 지금은 동진빌라가 들어선 이곳은 과거엔 아무도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 인접한 산도 없는 평지인데다 기찻길이 바로 옆을 지나갔다. 근처에 흐르던 개울은 수시로 범람해 도저히 마을을 구성하기 어려웠다. 또 습지인 관계로 논이나 밭으로 활용하기도 마땅찮아 원주민들은 사용할 엄두를 내지 않던 땅이기도 했다.

조선 명종 때부터 이곳에 일가를 이뤄온 권 씨 가문의 권창호(64) 씨는 "지금 럭비구장 안쪽에 흐르는 물이 복개하기 전엔 굉장히 큰 개울이었다"며 "우리 논이 교통안전공단에 있었는데 비만 오면 만날 물에 잠기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 버려진 땅에 월남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건 1955년 무렵이다. 해방후 남쪽으로 내려와 살던 월남인들이 이 곳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해 약 2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원주민들은 대부분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월남민들은 이 논밭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마을의 주요 작물은 참외였다. 밭에다가 기름종이를 씌워 온실효과를 내는 신농사기법을 통해 참외가 다른 곳보다 일찍 열려 큰 소득을 올렸다. 그만큼 인력도 많이 필요했다. 참외는 인분을 주요 비료로 사용하는데 마포 쪽의 인분이 이곳으로 다 들어올 만큼 참외 농사가 번창했다고 한다.

권 씨는 "흔히 오류골 참외라고 부르는 게 사실은 궁동에서 난 참외다"라며 "이게 영등포 시장이나 인천 시장으로 나가면서 오류골 참외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지주와 노동자 관계였던 탓인지 원주민들과 해방촌 주민들 간의 관계는 썩 좋진 않았다는 전언이다. 특별한 갈등은 없었지만 원주민과 외부인으로 구분되기도 해 서로 달가울 수만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민들은 해방촌이 있던 곳을 개건너라고 불렀는데 집성촌 등의 마을이 조성돼 있던 곳으로부터 개울 건너에 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이 두 주민들 간의 계층 분화는 이쪽과 저쪽을 이미 구분한 마을이름에서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방촌 주민들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마을을 강제로 떠나야했다. 정부가 무허가로 살던 이들을 쫓아내고 해당 부지에 변전소를 세웠다. 권 씨에 의하면 지금도 남아있는 이 변전소는 당시에 매우 중요했던 김포공항의 정전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약 6년 간 이곳에 거주하던 해방촌민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을이 사라지고 변전소가 들어 선지도 오래인데다 지금은 다세대 주거 지역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적지 않은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도 이곳에서 월남민들이 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을 떠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선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들은 구로에서 한 시기를 머물렀지만 어디로 가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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