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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39]구로지역 고대 지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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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39]구로지역 고대 지명 이야기
  • 김윤영기자
  • 승인 2007.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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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중요한 땅’ 으로
▲ 조선후기 지방도인 <해동지도>의 '부평부지도'.

지난 2006년은 TV 브라운관에 온통 사극 바람이 불었다. 황진이, 주몽, 대조영 등. 그리고 올해도 사극 열풍은 계속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 구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헌자료 속에 남겨진 구로지역의 고대 지명을 토대로 옛 고대 구로를 그려보자.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 까지 그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들로 불리면서 구로의 역사는 진행돼 왔다. 특히 구로구의 역사는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 일대의 역사와 같이 한다.

고대 삼한시대로 거슬러 가보자. 18세기 편찬된 <여지도서 부평부조>에 의하면 고대 삼한시대에는 한강 이남까지 세력을 미쳤던 마한의 54개 소국 중 우휴모탁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속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우휴모탁국이 강원도 춘천이라는 설도 있지만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마한 54개국 중 하나에 속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400여년간 백제의 영토에 속해있었다가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에는 안양천을 경계로 동쪽(신도림동, 구로동, 가리봉동)은 잉벌노현(仍伐奴縣), 서쪽(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천왕동, 항동, 온수동, 궁동)은 주부토군(主夫吐郡)으로 불려졌다.

잉벌노는 ‘뻗어나가는 땅’이라는 뜻을, 주부토는 ‘님터’ 즉 ‘중요한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 속에서 광개토대왕 때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정책을 이 지명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는 당나라제도를 모방하여 주(州), 군(郡), 현(懸)의 정비와 함께 전국을 9주제로 나누고 전통적인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치면서 주부토의 한자식 지명인 장제군(長提郡)으로 개칭하고 한주(漢州)에 편입시켰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태조 23년(940년)에 명칭을 개칭하였는데 이때 장제군을 수주(樹州)라 고치고 군을 주로 승격시켰다. 수주란 나무 수(樹)로 나무는 하천이나 바다를 가리키고 주(州)는 고을을 가리켜 ‘하천을 낀 고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 길주옥, 부평부 등 고대지명을 통틀어 고려때 가장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안남도호부 역시 수주와 마찬가지로 ‘하천을 끼고 있는 고을’이라는 뜻을, 계양도호부는 ‘밝은 빛이 으뜸인 고장’, 길주목은 길할 길자(吉)와 고을 주(主)자로 ‘길한 고을’, 부평부는 ‘넓은 평야를 아우르는 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각 시대마다 이 지역이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로 불리다가 왕에 따라 부평현으로 강등 됐다 다시 복귀되는 것을 반복했다. 그 한 일화로 세종 때에는 온수동 주민들이 온천의 소재를 알리지 않았다하여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켰으며, 연산군 시절에는 내관 김순손이라는 연산의 아버지인 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에게 직간을 하다 희생된 첫 번째 인물로 연산군의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그의 부모도 죽이고 김순손이 살던 고향이라 하여 부평도호부를 혁파(*묵은 기구, 제도, 법령 따위를 없앰)했다.

1914년 일제시대에는 땅 이름을 퇴색시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코자 부평에서 부자와 인천에서 천을 따서 부평군을 부천군 계남면으로 불렸으며 1931년에는 계남면에서 소사면으로 1941년 소사면에서 소사읍으로 불리었다. (해방전후부터 현대에 이르는 구로구 지명의 변천사 및 역사는 <184호 2006년 1월 1일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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