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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여행 WITH 박홍순작가 5] 이번 생은 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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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여행 WITH 박홍순작가 5] 이번 생은 망했어!
  • 박홍순 작가
  • 승인 2022.10.12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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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타 웨그만 [절망] 19세기말
베르타 웨그만 [절망] 19세기말

 

부쩍 자주 접하는 '이생망'
덴마크 최초의 여성 화가로 꼽히는 베르타 웨그만(Bertha Wegmann)의 <절망>은 몸과 분위기만으로도 그림의 주제를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얼굴을 팔 아래 파묻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절망이라는 감정을 그 어떤 그림보다 감상자에게 더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굳이 제목이 아니어도 주인공이 어떤 상태에서 허우적대고 있는지를 짐작게 한다. 

여인의 몸과 자세가 절망에 빠진 심정을 드러낸다. 한동안 머리 모양을 돌볼 생각이 없었는지 대충 쓸어넘겨 질끈 동여맸다. 몸을 가눌 힘도 없어 보인다. 머리와 팔, 가슴까지 탁자에 겨우 의지하고 있다. 한쪽 팔을 뻗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 없이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몸을 팔에 비스듬히 기대어 겨우 지탱하는 중이다. 이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시간은 흘러갔을 듯하다. 어디가 바닥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절망에 휩싸인 여인으로 다가온다.

한국에서 지금 이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리는 유행어를 찾으라고 하면 단연 '이생망'이다. '이번 생은 망했어!'의 줄임말이다. 

처음에는 20~30대 젊은 층에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국민적인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자기 나름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표현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어려운 처지가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절망이다, 

자기에게 닥친 절망의 감정을 전달하는 비슷한 유행어가 있다. 우리에게 십여 년 전부터 익숙한 '삼포세대' 혹은 'N포세대'가 가장 가깝다. 

처음 생긴 '삼포세대'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여기에 취업과 내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세대', 건강과 외모를 포함한 '칠포세대', 인간관계와 희망도 포기했다는 '구포세대'로 갈수록 늘어났다. 

이 모두를 포함하여 'N포세대'라고 부른다. 연애·결혼·출산·취업·내집·건강·외모·인간관계·희망 등 다양한 욕구가 거론되지만 대부분 빈곤과 관련된다. '이생망'은 '삼포세대'의 절망적 신음이다. 


세계 청년들의 깊어가는 '신음'

한국 청년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극심한 경기침체와 고용불안이 이어지면서 지난 20년 사이에 공통적인 문제가 되었다. 

유럽은 현재의 청년을 흔히 '1000유로 세대'라 부른다. 실업이 확대되고 저임금 비정규직 혹은 임시직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돈으로 한 달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를 빗대 생긴 말이다. 원화로는 약 130만 원에 해당한다. 

미국에는 '밀레니얼 세대'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의 고용 악화를 겪으며 불행한 청년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부모 세대보다 더 큰 잠재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고용불안 등 경제 상황 악화로 현실에서는 부모보다 더 많은 부채에 시달린다. 미국 언론은 이들을 '미국 역사상 가장 불운한 세대'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탕핑족'이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탕핑'은 중국어로 '드러눕다'라는 뜻이다. 열심히 일해도 합당한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어차피 경제적 어려움은 마찬가지라고 여기며 고정된 직장을 포기한다. 

일본도 '오야가차'라는 신조어가 청년의 곤란한 사정을 보여준다. 일본어로 부모를 뜻하는 '오야'와 장난감 뽑기 게임기를 가리키는 '가차'의 합성어다. 현재 일본의 청년들이 부모에게서 뽑아먹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희생당한 세대'라는 독특한 표현이 널리 퍼지고 있다. 경기침체에 더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위기까지 겹치면서 청년들의 고통이 증가했다. 이로 인해 학업·대인관계는 물론이고, 나아가 취업과 사회복지의 기회까지 빼앗겼다고 여긴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몇 년 사이에 20대의 소득 감소 폭이 다른 연령대에 비교해 약 2배에 이른다. 

프랑스 주요 일간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5%가 '스스로 희생당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국가가 청년만 희생시키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며 정부에 반발하는 거리 시위가 자주 벌어진다. <'희생당한 세대' 항의 시위> 사진을 보면 청년들이 '나는 환영받지도 못하고 희생도 요구당하는 세대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프랑스 ['희생당한 세대' 항의 시위]  2021년
프랑스 ['희생당한 세대' 항의 시위]  2021년

 

'희생당한 세대'와 '삼포세대' 차이

나라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불평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과거에는 빈곤을 당사자의 게으름이나 노력 부족 탓이라는 논리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개인, 특히 청년의 삶은 수렁이 발을 잡아당기듯 계속 하락했다. 여러 계기가 가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같은 절망의 표현이라 해도 한국의 '이번 생은 망했어'나 '삼포세대'와 프랑스의 '희생당한 세대'는 적지 않는 차이를 보인다. '희생'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게 다른 요인에 의해 현재의 처지로 내몰렸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당면한 실업·빈곤, 암울한 미래 등 절망의 원인이 사회가 강요한 열악한 상황에 있다는 자각이다. 현실의 고통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저항 의지가 자라난다. 

이에 비해 '이번 생'이든 '삼포'든 상대적이긴 하지만 다분히 개인 의미가 강하다. 내가 망하고, 내가 포기한다. 관심이 사회로 확장되기보다는 개인으로 향한다. 집단적인 자각의 가능성도 약하다. 비록 '세대'라는 표현이 붙어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나의' 연애·결혼·출산·취업·희망이고 '나의' 삶이다. 저항의 의미도 약하다. '망했어'나 '포기'는 분노보다는 좌절에 가깝다. 친구와의 대화나 술자리에서의 불만 토로에 머문다. 팔과 다리에서 힘이 빠지기에 십상이다. 

단지 한순간 내뱉는 말일 뿐인데 지나친 반응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 정신과 삶의 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유행어처럼 의도치 않게 우연히 마주친 언어가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은유적인 표현, 재미를 위한 과장, 언어유희를 위한 변경 등을 통해 의미가 숨겨진 채 우리의 생각에 스며들어온다. 게다가 유행어는 일상에서 수시로 사용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말을 자주 사용한다면 생각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진다. 

'이생망'과 '삼포세대'에 사회적인 의미나 저항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같은 현실을 표현한 프랑스의 '희생당한 세대'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러한 면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과 생각의 관계, 현실과 이에 대응하는 태도의 관계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유행어가 생각의 방향을 절망 상태를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이끌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박홍순 작가 ] 인문학·사회학 작가. 고척초등학교·오류중학교·우신고등학교를 나왔고, 지금도 구로구에 살며 집필 활동을 한다. 〈미술관 옆 인문학〉, 〈헌법의 발견〉, 〈생각의 미술관〉, 〈나이든 채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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