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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우리동네이야기 34]수궁골 도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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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우리동네이야기 34]수궁골 도당제
  • 박주환 기자
  • 승인 2015.11.13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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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수궁골 마을축제

수궁동 주민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도당제를 지냈다.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은 100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도당제가 열리는 날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도당고개에 모여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한 마음으로 제사를 즐겼다.

매년 정월 보름마다 지내온 도당제의 기원은 고려 말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헌을 통해 기원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서해로부터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도당제가 열리던 곳은 당제고개, 도당골, 도당고개라는 이름 등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온수힐스테이트 아파트 옆 산자락을 일컫는다. 도당과 도당나무의 위치는 온수배수지가 들어서 있던 곳 인근으로 전해진다.

오래전부터 도당고개는 가마나 상여가 지나갈 수 없었고 사람과 곡식을 실은 소들만 통행이 가능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아 온 안동 권 씨 가문도 문중에서 상을 당하면 멀리 산을 돌아 상여를 이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경사가 가팔라 애초에 소가 올라가기도 힘든 곳이 도당고개였다. 현재는 세종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선 이후 높이가 낮아졌지만 안동 권 씨의 후손 권창호 씨는 "500년 정도 전에 산세와 풍수지리를 감안해 인위적으로 고개를 높게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곳을 막아야 수궁동 지역이 번성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고개를 일부러 쌓아 올렸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당제의 목적은 마을의 발전과 평안이다.

곡물과 돼지를 잡아 올려 제사를 지내는 날엔 주민 모두 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고 아이들은 떡과 과일을, 어르신들은 술과 고기를 먹으며 한바탕 축제를 즐겼다.

도당제가 열리는 날엔 어김없이 남사당패도 마을을 찾아왔다. 약 20여 명으로 구성된 풍물패는 제사의 흥을 돋우며 대가로 곡물을 받아 갔다. 풍물패의 공연은 하루 종일 이어졌는데 제사가 끝난 후엔 마을로 내려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지냈다.

지신밟기가 시작되면 각 가정에선 쌀 한 말씩을 내놓았고 풍물패는 "이 집안의 누구누구야 복을 받아라"라고 축원을 하면서 땅을 힘 있게 밟으며 돌았다. 이렇게 모든 마을을 다 돌면 이날의 모든 일정이 끝을 맺었다. 

이 같은 도당제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90년 구로구청 개청 10주년 행사에선 100여 명의 주민이 함께 수궁골 도당제를 재현하기도 했으며 수 년 전에 산신제를 다시 운영했던 때도 있었다.

권창호 씨는 하지만 "주민들의 호응이 예상보다 많지 않았고 제사를 준비하는데 비용이 많이 필요해 결국 포기했다"며 "다만 지금은 구로에 시집왔던 정선옹주 행차를 재연해보자는 목표를 갖고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권 씨는 "도당제처럼 주민이 화합할 수 있는 행사가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깝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정선옹주의 시집오는 날의 재현을 정착시킬 수 있다면 주민 모두가 함께 즐기고 아이들에게 역사교육도 될 수 있는 좋은 축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선옹주는 선조의 일곱 째 딸로 안동 권 씨 권대임과 혼인했다. 이후 지금의 궁동에 아흔아홉칸의 대궐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여, 현 '궁동'(宮洞)이란 동네이름의 유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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