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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항동의 추억, 항동의 유산2] 항동철길에 뿌려진 반세기전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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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항동의 추억, 항동의 유산2] 항동철길에 뿌려진 반세기전 '눈물'
  • 구로타임즈 기획취재팀
  • 승인 2013.11.2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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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뒤'가 무너져 동네 망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었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벌써 한 시간 넘도록 이 길을 거닐고 있는데  더 걷고 싶을 정도예요. 철로 위를 걷는 재미, 희미하게 드러난 침목 위를 걷는 재미가 소소해요" 

일요일이던 지난10일 오후, 항동철길에서 만난 대학생커플 곽근영(20, 서초구)씨와 송정연(20, 도봉구)씨는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와 야생화사이로 쭉 내달린 녹슨 기차길을 걷는  이색적인 즐거움을 유쾌하게  펼쳐놓았다.

 기획 연재 순서   
 1.서막, 항동의 유래와 변천
 2. 항동사람, 평생을 살다 <1>
 3. 항동사람, 평생을 살다< 2>

 4.항동사람, 오늘을 살다
 5. 항동마을  문화생태지도
 6. 항동의 꿈, 항동의 기록

 

오래전부터 사진작가들 사이엔  출사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항동철길이 지난 6월 바로 옆에 문을 연 서울 유일의 '푸른수목원'으로 인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원에서 온 도시인들에게는 '도심 속에 아직도 이런 곳이!'라는 탄성을 절로 불러일으킬만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원시적인 자연풍광과 시골스런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항동철길의 본래 이름은 오류동선. 오류동역에서 출발해 항동을 거쳐 경기도 부천시 옥길동까지 이어지는  4.5km의 단선철도이다. 1954년 국내 최초의 비료회사이던 당시 경기화학공업주식회사(현 KG케미컬)가 부천시  옥길동에 설립되면서 원료 및 생산물 운송을 위해 착공 2년만인 1959년 5월에 준공해 이용해오다 온산 등으로 공장 이전 뒤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옥길동 인근 군부대로 이어져 있는 철로는  하루 한차례 낮12시쯤 수리 등이 필요한 군용탱크 등을 운송하는 모습으로 눈에 띌 뿐이다.

구로를 대표하는  '도심 속 풍경'이 된 항동철길. 그러나 항동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왔거나, 수십년 전 이 마을에 들어온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에겐 각기 다른 삶의 추억 등으로 한 자락씩 깔려 있다.

누군가는 항동일원에서 생산되는  소문난 과일이던  '오류골 참외'를 비롯  포도나 채소를  싸들고 오류시장으로 팔러가던 어머니의 짐보따리로, 누군가는 철길공사를 하던 총각시절의 남편과 이웃주민들의  일터로 기억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항동 안쪽마을의 유재억(66)어르신이 들려 준 철길개설 공사 착공 당시의 현장분위기 하나.  "산을 갈라 철길을 놓겠다고 했을 때 동네사람들은 동네 망하게 하는 짓이라며 반대했어. 공사 막는다고  노인 20여명이 가서 항의하거나 땅에 드러눕기도 하고. 산이 막아주는 동네라 가운데로 철길을 놓는 것은 항동의 '뒤'가 무너지는 것이라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 성황당이 있는 산이기도 했고,  풍수지리적으로 그래. 그 때 우리는 어려서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지 뭐."

산 한가운데를 자르 듯 두 동강이 내지 말고 터널식으로 뚫어 철길을 설치하라고도 제안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마을의 든든한 뒷배 인 '뒤'가 갈라져서일까. 이후  풍요롭고 평안하던 가정이나 자손들에게 안 좋은 일이 잇따라 일어나  아는 이들에게는 실제로 아픈 기억의 하나로 남아있다.

항동마을의 '뒤'를 막아주는 병풍 같은 산은 어디였을까. 바로 굴봉산이다. 굴봉산은  경인국도 남쪽으로 항동과 천왕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 굴이 있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표고 145.6m의 구릉산지다.

세 봉우리가 145.6m, 143m, 105m로  나란히 솟아 있으면서 그 능선으로 동 경계를 이루고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린다. 굴봉산의 남쪽으로는 동서방향으로 산등성이를 이루는   134m높이의  건지산이 있다. 항동과 부천시 옥길동의 경계를 이루는 건지산 인근 산지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항동저수지에 모인다. 굴봉산과 함께 항동의 뒤를 바쳐주는 또 하나의 산이다.  

굴봉산의 동쪽기슭이 오늘의 천왕동이라 불리는 천왕골이라면, 반대 편 서쪽기슭은 항동이라 불리는 항골.  항동고개가 있는 골짜기는 대낮에도 컴컴하고 습해서 부엉이가 울었기 때문에 부엉이고개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김녕군파 김영견이 승지벼슬 후 1783년 낙향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후 현재까지 후손 11대까지 살아오고 있다.  김씨집안에  이어 전주 이씨와 순흥안씨가 차례로 항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 항동마을은  2000년 이전까지 대표적인 집성촌 성격을 띠었던 곳이다.

"고고조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셨어. 쉽게 말해 서울 시장이지. 한성판윤이셨을 때 그 양반이 여기를 좀 크게 했으면 좋은데 한선판윤때 도성에 또 집이 있어서 거기 살았던 모양이야. 그 밑에 할아버지가 당상관인 통성대부를 지내셨고, 증조할아버지가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이나 마찬가지인 동래부 주사를 지내셨어. 그리고 왜정 시대를 맞게 됐는데 할아버지는 왜정시대에 벼슬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백면서생을 하시다가 여기서 서당을 하셨지. 그 밑으로 민선 초대 소사읍장을 하신분이 계시고...

마을과 집안의 역사를 말씀해주시던 김해김씨 집안 9대후손인 김영서(62)어르신이 풀어놓기 시작한  마을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돼, 한편의 시대적 영상을 보는 것처럼 막힘없이 생생하게 이어졌다.

"이 앞에 내천에는 아무 때고 가면 고기 잡고 저수지에서 수영하면서 수영 다 배우고 그랬어. 이 동네에 살면 수영 못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겨울 되면 스케이트들 거의 다 탔고. 앞 냇가 역곡천을 쪽 쫓아서 외날 썰매를 타고 저기 동아 방송 전파방송국 있는 데까지 가고 그랬었지.


살기 좋았는데. 그런 시골마을에서 자라다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계층들이 항동으로 밀려오기 시작한거야. 나는 그 밀려온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 생생하게 옆에서 지켜봤어. 소설을 하나 쓰고 싶을 정도지.  그 때 어렵고 힘들고 다 먹고 사는 게 주였으니까 마을 공동체가 당시엔 굉장히 잘 움직여졌어. 청년들도 그 당시에 4H활동이라는 걸 통해서 지역계몽을 많이 했고 새마을 회관 같은 걸 지어서 주민들이 새마을 운동을 했고 그 과정을 여실히 봐왔어.

그런데 그린벨트로 1973년에 지정이 되면서 마을의 발전이 딱 묶여버렸어. 아이가 크다가 병에 걸려 멈춰서 성장을 못하고 해가 지나면서 노쇠해져가고 병약해져가는 그거랑 하나 다를 바가 없어. 마을이 피폐해져 갔지.

그러면서 외지에서 지금 매화빌라 있는 마을에 답십리, 노량진에 국민주택이 들어서면서 철거민들이 몰려들어왔어. 거기를 5통이라고 했지. 그쪽은 5통, 이쪽(안쪽마을)은 4통. 거기 다 천막치고 정말 피난민 수준이었어. 지금 아프가니스탄 가면 그렇게 살 거다.

거기가 옛날엔 밭이었는데 진창이 많은 진밭이었어. 사람들을 진밭에 몰아 놓고 화장실 몇 개 간이로 만들어 놓았었지. 아침 되면 사람들이 용변을 봐야 하니까 쫙 줄을 서서 인간대접도 못 받고 그랬어. 커튼 쳐서 이쪽에 한 집 저쪽에 한집 그렇게 살았어. 상당히 많은 호수가 살았는데 100~150호 가량 살았어.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가 되면서 생겨난 명암과 희생의 그 어두운 면이 바로 이곳에 있었지.

그 사람들이 먹을 게 없으니까 어떻게 하나. 밭에서 도둑질도 해먹고 그래서 갈등도 있고 그랬어. 그래도 다들 힘드니까 양해하면서 넘어가고 그렇게 질서도 생기고 그랬지. 

당시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중1 정도에 5통으로 온 애들이 우리 친구였는데 지금도 만나면 그 때 아픔을 많이 얘기해. 지워지지 않는 개인사의 슬픔,  그런 아픈 역사를 우리 동네가 갖고 있어".

일제시대엔 종묘장으로, 60-70년대엔 부화장과 종계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기를 밥먹듯 하던 어려운 시절 식량증진의 한축을 맡았던 항동은 73년 개발제한구역 그린벨트에 묶이면서 시간이 멈춰섰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살던 수백년 역사의 마을은  각기 다른 빛깔의 '항동 속 세동네'로 나뉘어졌다.

 마을의 중심 굴봉산 아래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한 집성촌 중심의 안쪽마을과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구로구에서 가장 집값이 비싸던 타운하우스 형태의 그린빌라, 철거민촌에서 주거환경개선지구로 개발돼 분양된 매화빌라가 그곳이다.  기획취재팀=  김경숙· 윤용훈 ·박주환· 신승헌 기자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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