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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리동네이야기2] 현화마을 (고척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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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리동네이야기2] 현화마을 (고척2동)
  • 송희정 기자
  • 승인 2011.08.02 1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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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가옥 즐비했던 곳... 벽돌공장서 지명 유래한 듯

 20층 6개동 아파트단지의 위용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최근 몇 년 사이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변모한 고척2동 풍광의 백미는 단연 고척벽산블루밍아파트. 착공 3년 만인 지난 겨울 입주를 시작한 이 아파트는 디자인과 기술, 조경 등 자랑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도 원주민 정착률 70%라는 기록만큼은 서울시 재개발 역사를 새로이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만해도, 지금은 타지로 뿔뿔이 흩어진 30%의 주민들과 현 주민들이 옹기종기 형제처럼 모여 살던, 가난했지만 따뜻한 마을 하나가 있었다. 지금은 '세븐일레븐고척현화점' 등 일부 상호에 흔적이 남아있는 '현화마을'이 그곳이다.


 천주교고척동성당과 고척교회 사이 야트막하게 자리했던 현화마을은 재개발을 위한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리어카 한 대 들어서기 어려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큰 비만 오면 질척이던 가난한 동네였다.


 가옥 167채 중 일부는 번듯한 2층 양옥집이었지만 마을주민 대다수가 삶을 기댄 곳은 슬레브지붕을 머리에 인 작고 왜소한 단층주택이었다. 개중에는 목재와 브로꾸(벽돌)로 지어올린 일본식 가옥도 12채 정도 존재했다. '현화마을'의 이름 유래는 여기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고척향토사지를 공동집필한 경길수 고척2동주민자치위원회 고문은 "일제 때 고척공구상가 일대에 구운 벽돌, 즉 연와(煉瓦)를 찍어내던 벽돌공장이 있었는데 당시 그곳 종사자들이 살던 사택들이 이 일대에 많이 존재했었다"며 "현화라는 마을이름은 80년대 지어진 것으로, 당시 마을주민들이 연와에서 착안해 그렇게 부른 것 같다"고 말했다.


 문헌자료를 보면, 현재 덕의초 앞 고척2동 168번지 일대에는 일제 때 일본인 고바야시의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해 지은 삼공구주택(구로구지, 1997)과 벽돌 굽는 공장에 딸린 사택이 형성되었던 데서 유래된 연화사택(서울지명사전, 2009)이 존재했다고 전한다. 연와(벽돌)공장과 연화사택, 현화마을. 발음상 묘하게 연관된 고척동의 옛 지명들이다.


 이곳에서만 40년을 살고 최근 6년간 재개발조합장을 맡아 상전벽해를 일군 장본인인 김충신(63) 조합장이 회상하는 현화마을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따스한 정이 공존했던 눈물겨운 고향마을과 같다.


 김 조합장은 "당시 하늘에서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우산도 펼 수 없는 골목길이 많은데다 일본식 주택들도 즐비했고 재래식화장실을 쓰는 집들도 많았다"며 "가난하지만 정 많고 착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형제처럼 살던 시골동네 주민들이 이제는 고층 아파트단지에 모여 함께 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유난히 모정약국에 대한 추억이 남다르다. 마을주민들은 모정약국 주변에 형성된 골목시장에서 야채 등을 팔아 억척스레 삶을 일궜고, 모정약국 앞마당을 '약속다방' 삼아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유협종(76) 고척벽산블루밍경로당 회장은 "약국 어르신이 돌아가신 뒤로 문을 닫았지만 당시만 해도 주민들끼리 만날 때는 의례히 모정약국 앞마당을 약속장소로 정할정도로 그곳은 마을 주민 모두의 공동마당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현화마을은 이제 과거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같은 추억을 가진 마을주민들의 70%는 여전히 그 마을에 살고 있다. 현화마을 주민들은 한층 개선된 주거환경에서 여전히 옹기종기 형제처럼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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