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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28]구로의 역사를 함께해온 윤씨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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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28]구로의 역사를 함께해온 윤씨 문중
  • 김윤영
  • 승인 2006.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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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년 전 구로에 정착 전설속 아홉노인 중 한명

‘구로(九老)’라는 명칭은 옛날에 나이 많은 노인 9명이 장수하며 마을을 평화롭게 다스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파평 윤씨 문중의 선조가 이 9명의 노인 가운데 한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큰 집이 인천에 있었는데 7대조 할아버님 때 구로로 오게 됐어요. 딱히 구로를 염두에 두어 온 것이 아니라 형제간에 다툼이 생겨 이곳 구로에 정착하게 됐다”며 현재 윤씨 문중의 가장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윤윤(80, 전 대한노인회 구로지부 지회장)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윤씨 문중과 구로의 인연은 벌써 30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구로구의 역사와 같이 한다고 할 정도로 구로동 그것도 구로5동 일대의 대표 토박이 집안이 윤씨 문중인 것이다.

처음 윤씨 문중이 자리를 잡고 살았을 때는 사람이 살기에 좋은 여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 이렇게 윤씨 문중과 많은 후손이 자리 잡기까지 조상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구로구역사를 담은 <구로구지>에 따르면 ‘지금 구로5동의 동쪽 산기슭에 새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윤씨 농막과 서내 채의 집이 있었다’고. 이 한 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틀을 잡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때는 구로라는 이름이 대신 시흥군 북면으로 노량진도 이곳에 속했다고 한다.

“300년 전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고, 당시 애경백화점 인근 구로5동 일대는 원래 큰 산이어서 여우와 호랑이도 나오고 했다고 해요”. 윤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학교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산이어서 그런 동물들이 나왔다고.

구로에 정착한 윤씨 문중은 밭농사를 지으며 기반을 일궜는데 그때 만해도 밭농사, 벼농사 할 것 없이 ‘가물어서 안되고 비만 오면 물이 차서 안되고’ 농사지으며 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도림천 제방이 없어 비가 오면 지금의 구로구청 자리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때문에 마당에 놓고 타작까지 해야 농사가 다 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또 당시에는 학교도 없어 지금의 시흥까지 학교를 다녀야 했고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에 영등포구에 있는 문장초등학교 분교로 구로초등학교가 생겼다고 한다. 구로초등학교가 생긴 후 얼마 안 돼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이후에 구로에 공단이 들어서면서도 생활여건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윤 할어버지께 들어본 윤씨 문중의 이야기는 마치 구로의 역사를 듣는 것과 같았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속에서 흘러나오는 구로의 생생한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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