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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45]일제 식민지 하의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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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45]일제 식민지 하의 구로
  • 김윤영기자
  • 승인 2007.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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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에 퍼진 ‘만세 삼창’
1901년 일본 조선총독부 통치하에 놓이면서 일제는 우리의 고유문화를 말살하고,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 하는 등 무단정치를 일삼았다. 이러한 폭압에 대한 저항으로 지식인 ·학생 ·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3월 1일을 기해 독립운동 열기로 피어났다.

그 당시 구로에서도 만세 삼창이 울려 퍼졌을까? 그렇다.

향토사 「한국의 전통마을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 궁동 - 조상들의 품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실린 이명호 선생(온수동 토박이, 구로구지 편찬위원)의 인터뷰 글을 보면 “저희 할아버지는 1872년생인데 근 40줄에 나라를 잃으신 거죠”라며 “이 동네에서는 어디 올라서 만세를 불렀는고 하니 도당봉(현재 매봉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불렀대요. 유지는 물론이고 상인이구 양반이구 전부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겁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구로에도 오류역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사람들이 모여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일제시대의 구로구는 부천군 계남면에 속했다. 일제는 땅이름을 퇴색시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위해 전국에 걸쳐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했는데 구로가 속해있던 부평군 수탄면도 부천군 계남면으로 개편됐다. 부천군은 부평군과 인천의 합성어로 구로구의 고척리, 개봉리, 오류리, 궁리, 온수리, 천왕리로 현재 구로<갑> 지역이 이곳에 속했다.

1910년 오류동역 소재지에는 헌병출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오류동역의 당시 주요 발송화물은 쌀, 채소, 과일, 목재, 석재이고 도착화물은 소금이었는데 부근 주요생산물이 벼, 잡곡, 참외, 수박 등이었음을 미뤄볼때 부근의 농작물을 수탈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또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지 불과 3년 만에 오류동역 화물수송이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고 하는데 물자의 수탈이 그만큼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왜놈들이 고리대금업을 해서 갖고 있던 땅을 모두 빼앗겼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때 분들로 봐선 상당히 하늘이 무너지는 그런 심정이었다. 왜놈들에게 협조하는 것은 매국이라고 생각해 도둑을 맞아도 도둑이 조선사람이면 ‘우리는 안 잃어버렸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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