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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38]구로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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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38]구로구의 탄생
  • 김윤영기자
  • 승인 2007.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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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청년' 구로구

2007년이면 구로구가 탄생한지 27년이 된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 구로도 다양한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이만큼 성장했고 이미 더 큰 구로로 나아가기 위한 발돋움을 시작한 상태이다. 새해를 맞아 구로구의 역사를 정리하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1949년 8월 광복 후 서울시 행정구역이 확정되었고 동리명칭명 개정으로 조선시대 때부터 구로리로 칭해져오던 것이 구로동으로 불리게 되고 영등포구에서 직접 관할하게 됐다. 그리고 20여년 후인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으로 시흥군동면의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등과 부천군 소사읍의 온수리, 천왕리, 오류리, 개봉리, 고척리 등 대부분의 구로지역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구로구의 시작은 공업단지가 형성, 발달하던 1965년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마련되고 이것이 강력이 추진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에 ‘수출산업공업단지 개발조성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1965년 구로구에 제1차 수출산업공업단지가 지정되었다. 이후 67년에 제2차수출산업공업단지, 1970년에 제3차수출산업공업단지 가공업용지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구로구가 산업화 물결에 앞장서게 된다.

구로구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크게 변화하게 된 것도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된 이맘때부터. 1971년 구로동에 공영주택, 간이주택, 공익주택 1천여 채가 건축되면서부터 논과 밭 야산이 대부분이던 구로는 공장과 대규모 주거단지로 새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1980년 4월 1일자로 구로구가 탄생했다. 구로동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발전계획이 수립되면서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된 것. 영등포구 산하의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등 남부지역에다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온수동, 궁동, 천왕동, 항동 및 신도림동 까지 구로구라는 이름아래 하나가 됐다.

1985년에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의 구속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단체와 민중운동세력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대된 구로동맹파업이 전개됐다. 구로동맹파업은 지금까지도 1980년대 전반기 정부와 자본가의 본질을 폭로한 중요한 노동운동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2년후인 87년, 대통령선거와 관련해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 사건이 발생했다. 시민, 학생들의 항의농성 중 군사정권의 공권력 투입과 인권 유린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격변의 시간들을 거치던 구로구는 1995년 3월 1일 금천구로 분구, 독산동, 시흥동, 가리봉동 등 일부지역이 금천구로 편입된 가운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금천구로 분구된 후인 1995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려, 최초의 민선자치단체장인 구로구청장 선거가 실시돼 민주당 박원철 후보를 비롯한 4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구로구에도 민선자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최근 구로구의 로고마크와 브랜드가 디지털 도시 이미지에 맞춰 변경됐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구로는 정상을 향해 한발자국씩 내딛고 있다. 앞으로 또 구로구 연혁에 어떤 한 줄이 추가될지 모르지만 구로 지역주민의 한사람으로써 그 한 줄이 구로구의 발전을 위한 한 줄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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