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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사이로] 구로동의 '까치까치 설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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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사이로] 구로동의 '까치까치 설날은'
  • 성태숙 시민기자
  • 승인 2023.01.20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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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들어온 구로동에서 아직 살고 있다. 그런 구로동에서 아버지는 국수를 만들어 팔며 자리를 잡았다. 구로동에 들어올 때는 시골에서 상경하며 챙겨온 거의 모든 것들을 잃은 후였다. 어머니는 배고파 우는 자식을 업고 광명에 있는 친척 집으로 돈을 꾸러 다리를 건너셨다. 그 아이가 어쩌면 나였던 듯도 싶다.

그래도 젊었던 아버지는 가끔 웃으셨다. 허옇게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국수 기계에 매달려 계셔서 사람조차 희미한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가끔 모자로 밀가루를 털어내며 헤실하게 웃으시곤 하셨다. 그러나 불안한 삶과 고된 노동으로 지친 부모는 아이들을 살뜰히 챙길 여력이 없었다. 그것이 못내 힘들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살아야 한다고 그러시는데 거기에 딴소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삶의 기틀이 세워져 가면서 설과 추석의 명절날들도 함께 자리를 잡아 갔다. 지금은 구로동 시장에도 방앗간이 많지 않지만, 그때는 동네 한복판에 버젓이 방앗간이 있어 떡을 빼던 시절이었다. '못 사는 동네에 왠 방앗간?'하고 의아할 수도 있지만, 당시 구로동에는 점집이나 신당들이 골목마다 깃발을 세우고 굿판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방앗간쯤은 거뜬히 동네에서 건사하고 살던 시절이다. 

설을 앞두면 방앗간 앞 길가에는 가래떡을 뽑기 위한 빨간 '고무 다라이'들이 죽 줄을 서곤 하였다. 

잠시 새는 이야기로 나는 별로 국수를 즐기지 않는데, 그건 역시 내가 국숫집 딸이었던 탓이 크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자주 라면은 달랑 하나만 넣어서 국물맛만 내고, 국수와 김치는 잔뜩 넣고 끓인 것을 점심으로 차려주시곤 하셨다. 

입이 짧았던 나는 어떻게든 라면만 건져 먹으려 용을 쓰다 잔소리만 푸지게 먹곤 하였다. 그러니 그런 국수만 먹다가 닭고기 꾸미로 맛을 내고, 달걀지단과 김 가루를 올렸으며, 쫀득하게 씹히다가 매끈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떡국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절로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동태며, 고구마, 동그랑땡 등의 부침개가 소쿠리마다 그득하게 쌓여서 아무 때나 '날 잡아 잡숴'하고 기다리는 명절이라니 말해 더 무엇하랴? 하지만 그렇게 푸짐하게 먹으려면 차례 음식을 만드느라 어머니와 나는 깊은 밤까지 부엌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어머니께서 나물을 무치고, 방앗간까지 빼온 떡을 썰어내고, 닭과 생선, 고기를 삶아내실 때, 나는 하루종일 '곤로'와 후라이팬을 독차지하고 부침개들을 부쳐냈다. 내 먹을 것을 스스로 부쳐낸다고 생각하니 어린 나이에도 늦은 밤까지 일하는 게 하나도 고단하지가 않았다. 그저 걱정은 어머니께서 부침개 재료를 적게 장만하실까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마련만 해주시면 얼마든지 부쳐 먹으리라! 기세가 등등했다.

명절 전 식구들은 따로 목욕탕을 다녀왔다. 더 이럴 직에는 안방에 커다란 들통을 들여놓고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목욕탕에서 먼저 명절 준비를 하게 되었다. 아무리 빌어도 때를 미는 어머니의 손은 좀체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가져간 수건까지 야무지게 빨고 나서야 새빨개진 몸으로 설을 앞둔 새벽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을 치우고, 장을 봐오고, 음식을 만들고, 인사를 다녔다. 아버지는 옷장 깊숙이 간직한 유일한 양복을 꺼내 입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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