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과 암(暗)이 교차되는 구로공단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국가산업발전의 역군'이라는 칭송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하가 동시에 나돌던 구로공단이었지만 그곳에서는 언제나 사람냄새가 물씬 났다.
음악다방 '나포리'를 아시나요?
■ 인산인해(人山人海)
"사람들이 '공순이'라고 부르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외출할 때면 일부러 학생처럼 보이려고 옷을 입었죠."
구로공단 여공 대부분은 가계를 책임졌다. 남동생이나 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들은 라면이나 핫도그로 끼니를 때우며 월급의 대부분을 집으로 보냈다. 벌기도 힘들었지만 쓰는 것도 그만큼 힘든 고단한 삶이었다. 그런 그들을 세상은 '공순이'라고 낮잡아 불렀다. 그 말은 삶의 무게를 더했다.
그런 여공들에게 시장, 음악다방, 디스코장 등은 피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창구였다. 가리봉시장과 남구로시장은 떡볶이나 냉면, 쫄면 등을 먹는 여공들로 넘쳐났고, '별', '가리봉', '나포리', '다빈치' 등과 같은 음악다방은 만석을 이뤘다. 디스크자키를 보기위해 다방을 찾는 여공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영등포에 있는 '원투쓰리 디스코장'까지 원정(?)을 다니기도 했다. '가리봉', '나포리' 같은 음악다방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중국동포들이 이용하는 커피호프집이 되었다.
종합선물세트 안고 고향으로
■ 금의환향(錦衣還鄕)
명절을 앞두고는 특히 일거리가 많았다. 야근에 이골이 난 구로공단 노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도 명절은 공단사람들에게도 최대의 축제였다.
저마다 멋지게 차려입은 지방출신 노동자들은 설탕이나 종합선물세트 등을 한아름씩 안고 귀향길에 올랐다. 뾰족구두를 신고 서울에서 내려온 선배는 고향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구로공단에 일자리를 찾으러오는 사람도 많았다.
인근 시장 상인들도 덩달아 신났다. 1976년부터 공단 인근에서 양복점을 운영해 온 구자광 씨는 "명절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낮밤 없이 일했다"며 "양복점 직원들이 잠이 부족해 출퇴근하는 버스에서 졸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대우어패럴 등 일부 회사에서는 귀향버스를 마련하기도 했다.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행선지 별로 모여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식이었다. 직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지만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노동자들이 꽤 많은 탓도 있었다.
"햇빛보며 퇴근하는 길 행복"
■ 주경야독(晝耕夜讀)
초졸, 중졸 출신이 대부분인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위해 1977년 정부는 공단인근에 '산업체특별학급'을 만들었다. 오빠와 남동생 등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공장에 취직한 여공들은 '산업체특별학급'이 있던 대방여중, 영등포여상, 영등포여고, 영등포공고에서 멈췄던 학업을 이어나갔다. 수업은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됐다. 산업체특별학급을 통해 대방여중을 졸업한 윤혜련 씨는 "교복입고 공부하는 것도 좋았지만 야근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했다. 윤 씨는 "햇빛을 보며 퇴근하는 길이 너무 행복했다"고 덧붙였다.
공단에서 연애를 시작해 동거생활로 가정을 꾸리는 이들도 많았다. 78년도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구민회관 등에서 이들을 위한 합동결혼식도 진행했다. 당시 무료사진촬영 봉사활동을 했던 구자광 씨는 "물난리가 나서 결혼사진이 없어졌다고 둘러댔지만 드레스 한 번 입어보지 못해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는 주민들이 많았다"며 "합동결혼식을 통해 한을 푼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도 사람냄새 가득했던 구로공단을 사랑했다. 구로공단에서 근무했던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 공지영 작가의 '동트는 새벽', 구로공단을 배경으로 한 '구로아리랑', '장미빛 인생', '박하사탕', '가리베가스'와 같은 영화들, 노동현장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은 노동자들의 '시' 속에 구로공단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