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용 선생은 지역내 오류동 일대를 기반으로 한국사회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동경 유학시절엔 함석헌, 김교신 등과 신학 잡지를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오류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엔 오류초등학교의 전신인 오류학원을 설립해 돈이 없는 아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쳤다. 오류애육원도 송 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은 그의 조카 송석도 원장이 설립했다. 굶주린 자에겐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겐 옷을, 병든 자에겐 보살핌을 베풀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고,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도 대다수가 모르는 상황이다.
송두용 선생이 오류동에 내린 뿌리는 수많은 오류초등학교(오류1동 소재) 졸업생들을 비롯해 여전히 지역사회를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하지만 항일운동으로 2010년 건국포장을 받은 애국지사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내년이면 송 선생이 82세의 일기로 소천한 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그의 사상과 업적은 선생을 추억하는 사람들 속에선 여전히 계승되고 있지만 도시화를 겪은 지역사회에선 이미 잊혀진 것처럼 보인다.
이에 구로타임즈가 지역애향심제고 등을 위해 지난 2005년부터 5년간 어린이등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우리지역알기 문화탐방'에 이어 향토인물 발굴을 시작한다. 15주년 특집호에서는 그같은 사업의 첫걸음으로 송두용선생에 대한 조명을 시작한다.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흘러간 지금, 선생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지역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제고하고 나눔의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다음세대를 위한 반석으로 삼기위해서다. <편집자 주>
평생 베푸는 삶 실천 일화 수두룩
'성서조선사건'으로 일제하 옥고치뤄
송두용 선생은 동경 유학을 마치고온 지 2년만인 1930년에 당시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오류리, 지금의 오류동역 일대의 땅을 매입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선생은 양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막대하고 처가도 종로 한복판에 99채짜리 집을 짓고 살았을 만큼 유복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 오류동에서 일군 지역사회의 꿈
이런 그가 자신의 사상을 담은 신앙 및 교육활동에 박차를 가한 것도 오류동으로 거점을 옮긴 시점부터다. 송 선생은 '모든 곳이 교회다'라는 무교회 신앙을 기반으로 가정집회를 열었다.
또 그해 12월 3일엔 오류초등학교의 전신인 오류학원을 현재 오류동 지하차도 근처를 지나는 철길 옆에 개원해 주간엔 아동, 야간엔 성인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쳤다.
오류학원은 훗날인 1943년 5월 오류공립국민학교로 인가와 동시해 개교했고 지금의 (구로구)지역 최초의 초등학교로서 올해로 72회 졸업을 맞이하며 지역 인재 배출에 기여했다.
당시 그의 행적을 기억하거나 건네 들은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베푸는 삶과 청빈한 생활을 입 모아 칭송한다.
■ 멈추지 않던 선행
송 선생이 시아버지의 작은아버지라는, 즉 시작은할아버지라고 밝힌 오류마을(오류애육원)의 정재옥 원장은 "1975년 3월 (송 선생이)경기도 광주에 있는 집까지 직접 와서 약혼 예배를 인도해주시기도 했다"며 "따뜻한 분이셨지만 신앙과 남을 돕는 일에는 매우 완고했다"고 회상했다.
정 원장은 또 "크리스마스가 되면 (송 선생이)땅을 판 돈과 수확한 쌀을 우리 시아버님에게 시켜 어려운 집에 몰래 갖다놓고 오라고 한 적이 많았다는 이야길 들었다"고 전했다.
정 원장의 시아버지 되는 송석도는 송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류지역 농업발전에 기여하고 오류유치원과 오류애육원을 설립하는 등 지역 어린이 교육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송 선생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수시로 돕고 어린 거지들과 병자들을 집으로 들여 보살 폈으며 자신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일대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송 선생의 가산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선 쓴 것 없이 십여 년 만에 대부분 소진됐다. 결국 그의 나이 44세이던 1948년 오류동의 집을 정리하고 인천 송림동 셋방으로 이사를 갔다
오류동 중심 '무교회 신앙' 활발
함석헌 김교신 유달영 등과 활동
홍성 풀무학교 강의활동 등도 펴
그러나 어려운 인천생활 와중에도 선생은 설날이면 떡을 만들어 나환자 부락에 기증하곤 하는 등 그의 선행은 멈출 줄을 몰랐다고 한다.
막내아들 송석증 씨는 이와 관련해 "그 많은 재산이 아버지에게는 신앙의 방해물로밖에 생각되지 않으셨는지도 모르겠다"며 "유산을 다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싸게 파시고 그 돈으로 천국을 사신 것이다"고 회고한 바 있다.
■ 유복한 어린 시절, 일본 유학 그리고…
송 선생은 본래 조선 후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의 후손으로 1904년 7월 31일 아버지 송헌옥과 어머니 유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자랐지만, 통천군수였던 친척 송헌기가 자식 없이 별세하자 양자로 들어가 그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는 후일 송 선생이 큰 선행을 베푸는 기반이 된다.
14세엔 지금의 서울 종로에 있던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7세에 종이품 무관의 손녀이자 경기여고를 졸업한 배계숙 여사와 만나 혼인했다.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22년엔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 유학을 떠나 정측 영어학교와 연수학관을 다녔다.
청운의 꿈을 키우던 송 선생은 그러나 이듬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른바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며 유학을 이어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관동지방엔 진도 7.9의 강진이 발발해 14만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되고 3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때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세간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확산됐고 일본 경찰 등에 의해 조선인 3000~6000명가량이 죽임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희생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 간 이주자들이었으며 그 중엔 유학생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 사건이 송 선생에겐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귀국 후 1924년 경 부천군 영종도에 소재한 영종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했지만 신경쇠약이 발병해 두 달 만에 사직했다.
■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 그후
송 선생을 시초로 하는 무교회 예배 오류집회를 지금도 이어 가고 있는 정왕초등학교(경기도 시흥시)의 손현섭 교장은 "선생이 항상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르며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데는 이때의 경험이 크게 영향을 준 것 같다"며 "이후 두 번째 동경 유학 때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부터는 두통도 멈췄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선생은 1925년 두 번째 동경 유학길에 올라 동경농대에서 농업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으며 이 때 무교회 사상의 선구자인 우치무라 간조 선생을 만나 신앙을 받아들이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26년엔 양정고등보통학교 2년 선배이던 유석동과 함께 우치무라 집회에서 한국인 학생 4명을 만났고 이들과 성서연구회를 만들어 1927년 7월 1일 '성서조선'을 발간, 독립운동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신앙활동에 투신했다. 이때 만난 한국 학생들이 바로 함석헌, 김교신, 양인성, 정상훈 등의 위인이다.
■ 오류동에서 이어진 함석헌 선생과의 인연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나 함께 독립, 신앙운동을 했던 함석헌 선생과의 인연은 광복이후 오류동에서 다시 이어진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 직후 공산당 만행을 규탄한 신의주 학생반공시위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다가 풀려났고 1947년 3월 경 고향(평안북도 용천)을 등지고 월남한다.
이때 함석헌은 송 선생을 찾아 의탁했는데 "38선을 넘어서 올 때에도 저는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친구도 별로 없어, 송 형을 목표로 의지하고 내려와서 오류동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수고를 많이 끼쳤다"며 남다를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또 1940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 일본경찰이 보내주지 않아 상주 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그 때에 서울에서 용천까지 천리길을 김교신과 이분(송두용)이 같이 와서 저를 대신해서 상주노릇을 해주셨다"며 각별한 기억을 소개한 적도 있다.
송 선생도 이에 못지않게 함석헌의 월남을 반겼다. 그는 신앙동지인 함 선생을 자신의 성서연구모임에 데려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이북에서 이남으로 옮겨졌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자신의 집에 거처를 내어줬다.
송 선생과 함선생은 약 1년여 간 오류동에서 함께했지만 송 선생이 인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거점을 달리했다. 그러나 함 선생은 이후에도 오류동에 머물며 각 학교와 단체에서 성경을 강론했고 양계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오류시장에서 개봉동 잣절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던 함석헌의 양계장에서 양계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독립유공자' 송두용
송두용 선생은 돌아가신지 24년만인 2010년에 항일운동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돼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이때부터 송 선생은 대전 국립공원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됐다.
주요 업적으로는 1927년 잡지 간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김교신 선생 등과 함께 1년여 간 옥고를 치른 것등이 거론 됐다.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 집회에서 만난 송두용, 유석동, 김교신, 함석헌, 양인성, 정상훈 등 6명의 동인은 1927년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통한 기독교 정신으로 극복하자는 목표로 '성서조선'을 발간했다. 이후 1930년 6월호부터는 김교신이 홀로 잡지를 만들었지만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1942년 3월호 158호 권두언 '조와(吊蛙)'의 내용이 동면에 빠진 개구리를 민족에 빗대어 애도했다고 본 조선총독부가 이를 구실로 잡지를 폐간하고 동인 등 관계자와 독자들을 검거했다.
이때 송 선생은 김교신, 함석헌, 유달영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으며 근 1년여 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한 일본 경찰은 1943년 3월 29일 밤 이들을 풀어줬고 '100년 이후의 독립 터전을 마련하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의 탄압 과정에선 오류학원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는데 당시 학원 마당 울타리에 심어져 있던 무궁화 한 그루가 발견돼 오류학원 선생들과 졸업생들이 잡혀가 취조를 받기도 했다.
■ 전쟁이후 다시 오류동으로
광복이후 송 선생은 김해로 피난을 내려갔다가 경기도 소사에 잠시 머물렀고 1955년 다시 오류동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개인 전도지를 '성서인생'으로 이름을 바꿔 속간하고 김해, 부산, 대전 등 전국각지는 물론 일본까지 넘어가 전도활동을 벌이는 등 왕성한 신앙생활에 힘썼다. 송 선생의 개인전도지는 선생 생전 1967년경 '성서신애'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정왕초 손현섭 교장에 의해 매달 발간되고 있다.
이 시기 선생은 특히 홍성에 자주 방문했다. 당시 홍성엔 1958년 4월 이찬갑과 주옥로가 설립한 풀무농업기술학교가 있었다. 풀무학교는 민족학교라 불렸던 오산학교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설립자를 비롯해 송두용, 노평구 등 무교회 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송 선생은 이곳에 자주 방문해 성서집회와 특강을 진행했고 학생과 교사가 구령 없이 인사하는 경례법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선생의 막내 아들인 송석증이 풀무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 한국 최초 협동조합 만든 홍성 '풀무학교' 강연
한국 지역신문의 효시 홍성신문의 전 편집장인 이번영 선생도 이 학교 출신인데 동년배인 송석증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며 송 선생을 여러 번 뵀다고 전했다.
이 전 편집장은 "풀무학교에 다닐 때 송두용 선생이 자주 와서 강연을 해주셨고 많은 교훈을 받았다"며 "무교회 사람들이 만든 풀무학교를 기반으로 한국최초의 협동조합과 최초의 지역신문이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풀무학교가 문을 연 해에는 학용품 공급을 위한 협동조합이 만들어져 학교안에 설치됐고 2회 졸업생인 이번영 선생이 4쪽짜리로 시작한 홍동신문을 시작으로 1988년 홍성신문을 창간했다.
이번영 선생은 이밖에도 "서울에 올라가면 그 집에 가서 자고 그랬다. 집에서 자면 재워주고 밥도 주고 정말 잘해주셨다"며 "굉장히 온화한 성품이셨고 돌아갈 때면 한참 따라 배웅해주시면서 여러 가지 인생의 중요한 얘기를 계속 해주셨다"고 개인적 기억을 술회했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벌여오던 선생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77세였던 1981년경. 당시 선생은 공무를 손에서 떼고 미국여행을 떠났지만 그 해에 노환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엔 더욱 병세가 악화해 오류동의 덕산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별다른 차도 없이 퇴원했고 언어장애와 거동부자유 상태가 이어졌다.
세상을 떠난 건 82세였던 1986년 4월 10일 오전 6시 45분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지역과 한국사회에 헌신했던 '오류동의 어른'은 그렇게 잠들었다.
한편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이런 어르신등에 대한 여러 업적이 널리 홍보되는 기념사업이 진행되어 오류동 주민으로서 또한 오류 초등학교의 종업생으로서 자부심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