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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6] 육군본부단지로 조성되던 삼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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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6] 육군본부단지로 조성되던 삼덕마을
  • 박주환 기자
  • 승인 2014.05.21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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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고척2동 241-52번지 일대. 흙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삼덕마을을 번듯한 마을로 일궈낸 건 오직 주민들의 힘이었다. 주민들은 전기도, 도로도, 수도도 모두 주민들의 협력으로 처음 만들어졌다고 했다. 어쩌면 삼덕마을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마을만들기사업의 큰 형님뻘 되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이곳에 주택들이 생겨난 것은 1970년도. 육군본부에서 장교들을 위한 택지, 이른바 육본단지를 조성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논밭으로 이뤄져 있던 산 중턱의 필지들을 분할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동네라고도 부를 수 없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문신숙(87) 할머니는 "1960년대에 이곳으로 영감이랑 이사를 왔는데 그때는 우리집하고 맞은편의 절집 두 개밖에 없었다"며 "여기서 살기 시작한 것은 우리 집이 처음이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택지 조성 이후에도 전기, 도로, 수도 등 기본적인 사회간접자본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연탄을 실은 차가 흙으로 된 산길을 오르지 못해 개봉입구(현 개봉사거리 인근) 앞에서 멈춰서야 했던 것은 기본, 물이 부족해 겨울이면 눈을 녹여 먹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금기춘(69) 할머니는 "당시에도 수도가 있긴 한데 밑에서 먼저 쓰니까 위에는 안 나오는 상황이라 물을 받아 놓고 먹고 그랬다"며 "물 문제가 심각해서 옛날에 TV에도 나왔던 동네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었다. 삼덕 경로당 어르신들은 "오류동과 이쪽 동네 사람들은 다 장화신고 다녔다"며 "장마철엔 여기는 높은 곳이라 괜찮았지만 아랫마을에선 장롱도 떠다니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만약 당초 계획대로 장교들이 대거 입주해 살기 시작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인가족들은 동네 지대가 너무 높다는 이유로 집을 팔고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빈집들을 채운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일반인들이었다.

문 할머니는 "우리 영감도 당시 육군본부에서 정훈장교로 있었는데 여기가 육본단지라고 불리기만 했지 실제로 여기서 산 군인은 저 아래 이 대령집과 우리집뿐이었다"며 "지금은 그 군인들도 다 돌아가시고 군인 가족은 나랑 이 대령집 부인 둘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동네에 모인 주민들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직접 마련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새마을회, 부녀회도 만들고 통반장도 뽑아 동네를 만들어 갔다.

문 할머니의 남편이 당시 전화국에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전기를 끌어오는가 하면 주민들이 손수 자금과 시간을 들여 도로를 닦았다. 또 개인이 설치한 물탱크를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수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삼덕마을이란 이름도 이즈음 지은 이름이다. 그 당시 새마을회의 이상용 회장이 35통, 36통, 37통을 묶어서 삼덕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의 주민들은 서로 부족한 가운데 물도 나눠먹고 마을의 문제가 있으면 같이 모여 회의도 하며 동네를 가꿔나갔다.

그래서일까. 이곳 주민들은 마을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해보였다. 특히 동네에서 반장 등의 활동을 해오던 문 할머니는 노인회장을 마지막으로 재작년 즈음에야 마을 일에서 손을 놓았다. 반장 일만 무려 33년을 했다.

지금은 옛 주민들 상당수가 마을을 떠났지만 그래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아있는 주민들, 동네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당시의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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