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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166]고척근린공원에 달빛이 흘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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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166]고척근린공원에 달빛이 흘러요
  • 성태숙 시민기자
  • 승인 2017.04.24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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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에서 보냈던 내 어릴 적 기억 속을 더듬어보면 한없는 자유로움은 있었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 때는 쉽게 하는 말로 먹고 살기 힘들 때라 그랬다고들 이야기를 하는데, 한 번씩 그래도 그 땐 왜 그렇게 유난스럽게 사는 게 팍팍하게 느껴졌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최근 그 비밀이 조금 풀렸다. 상담 공부를 하는데 집안 가계도를 그려내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해가는 것을 숙제로 받게 된 것이다. 그 숙제를 하면서 어머니께 집안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청년으로 막 결혼하고 스스로 집안을 만들어 가야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참에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맨주먹도 맨주먹이지만 맨가슴으로 시린 세상에 맞서서 자식들을 키워내야 했던 아버지의 모질었던 인생 이야기를 너무 늦지 않게 듣게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아버지였으니 비로소 내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또 두렵기도 했을까 이리저리 생각이 많다.

어쨌든 그런 속이니 홀로 고군분투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끼고 또 아껴서 다음번에도 먹을 수 있고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억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어묵볶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오뎅이란 말로도 자주 쓰고, 덴쁘라라는 일본 말로도 자주 불렸던 어묵은 라면과 함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실은 지금도 맛있는 것 좀 먹읍시다 하는 말을 들으면 어묵부터 생각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묵은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한 번은 그 어묵을 볶아서 반찬으로 달라고 어머니께 울면서 고집을 부리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주면 주는 대로 먹지 밥투정을 한다'고 호되게 꾸지람을 내리던 어머니 모습에 속상하고 섭섭하던 마음이 응어리처럼 뭉쳐져 내 어린 시절은 자주 꾸지람 듣고 맞고 속상하던 순간들로 이리저리 얼룩이 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에서 가게를 하던 아주머니께서 심부름을 간 내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주셨던 것이다. 아마도 내게 특별한 감정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것이 사무치게 고마워서 나이가 한참 들 때까지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 무엇처럼 마음속에 간직해놓고 꺼내보던 기억이 되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인정을 베푸는 일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 그 아주머니께 추운 아침에 심부름을 왔다고 기특하다고 인정을 받는 듯한 그 말 한마디로 어린 시절의 우울하고 힘든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에 나가서 아예 따뜻한 밥을 지어놓고 따뜻한 마음을 내어 아이들을 품어주겠다고 판을 벌여놓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이루어질 위로와 용서와 세상을 한 걸음 더 살아낼 수 있는 용기는 또 어떠하겠는가?


그런 일이 바로 어제 고척동 근린공원 안에서 있었다. 엄마들이 모여서 달빛 아래 배고프고 마음 고픈 동네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린 것이다. 그것도 벌써 두 해째 일이다. 어제는 제법 날이 찼는데도 구로교육복지센터와 함께 한 상을 뚝딱 차려내고 그 고마운 모습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면서 나도 아련히 잊고 있었던 그 위로의 기억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는 동네, 그래서 홀로 울고 홀로 아파하지 않도록 하는 동네, 그런 동네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동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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