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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소리] 투명예산위한 70대 어르신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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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소리] 투명예산위한 70대 어르신의 '도전'
  • 김경숙 기자
  • 승인 2015.12.14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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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간의 외로운 투쟁... "공공시설물 가격정보 표기 의무화를 제안합니다"
▲ 이영남 어르신 (구로1동)

"저 분은 누굴까".  4500억원 대에 이르는 구로구 새해예산이 제대로 편성된 것인지 체크하는  예비심사가 한창이던  지난 8일 구로구의회 상임위원회실.

은색 잠바 차림에 해병대를 상징하는 검은 모자, 주홍빛 운동화를 착용한 건장한 어르신 한 분이 구의회 4층과 6층에 있는  내무행정위와 도시건설위원회회의실로 오가며 공무원들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질문하는 의원이나 답변하는 공무원이나 차마 묻지는 못하지만, '도대체'라는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올해 74세의 이영남 어르신.  40대 후반부터 지난 27년 동안 구로1동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다. 그가 오늘 동네주민으로서 구의회에 '첫 나들이'를 나선 것이다.

"투명행정시대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핵심은 돈이 투명하냐, 즉 예산의 투명성인 것입니다. 시민세금으로 건립한 것인 만큼, 주민들이 산책할 때 마주치는 정자나 운동시설, 벤치, 화장실, 놀이시설, 버스정거장 등의 설치물에 최소한 언제 누가 얼마에 설치했는지 표시하자는 것입니다." 

공공시설물에 대한 가격정보(소요비용)등의 표시를 의무화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면 세금이 적절한 곳에 적절하게 시공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시설물이라 물건을 아끼는 마음도 갖게 되지요. 또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도 별도의 정보공개청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행정서비스가 될 수 있습니다."

가격정보 등 표시에  드는 예산을 우려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정리한다. "많은 돈을 들일 것도 없어요. 신규로 설치할 때는 계약조건에 명시하면 추가비용이 들지 않아요. 기존시설물의 경우는 전산화에 의한 가격정보가 있는 것까지 연차적으로, 시설물에 따라 적정한 크기로 잘 보이는 곳에 표시하면 됩니다. 판넬 등으로 1-2만원 선에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스마트폰 시대에, 동네별로 설치된  운동기구의 가격과 모델정보 등을 멀리 사는 친구와 통화하다 동일모델인 경우 가격차가 있음을 알아낼 수도 있고, 설치 시기가 한 두해 밖에 안됐는데 녹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품질문제의 원인을 밝혀낼 수도 있다는 것. 시민세금인 예산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일상생활속 주민 감시활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일을 누구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사는 구로에서 조례가 만들어지면 타 자치구로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겁니다." 그래서 구의원들의 의원발의를 통한 조례제정으로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이날 구의원들과 안면도 트고, 제안설명도 하기 위해 달려왔다는 설명이다.

지난 8일 내년도 구로구예산에 대한 구로구의회 도시건설위원회 예비심사장. 이영남 어르신이 공무원과 의원들의 질의답변을 유심히 듣고 있다.

 
 ■ 두달 전 산책길에 떠 오른 아이디어

지난 10월초 구로구와 금천구로 이어지는 뚝방길을 산책하던 중 벤치와 화장실 등을 보면서 불현 듯 떠오른 이 '생각'으로 그 즉시부터 지난 두달 가까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뚝방길 화장실을 담당하는 금천구청 치수과를 시작으로 금천구 국회의원 지역사무소, 구로구청 직소민원실과 기획예산과, 권익위원회, 서울메트로, 서울시청 등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문서로  끊임없이 제안했다.

지난 10일(목) 오전 구로타임즈 신문사를 방문한 이영남어르신이  한시간 반 넘게 털어놓은 내용 중  거의 한 시간 가까이는  시민(주민)인 한 개인이 제대로 된 우리 사회를 위한 공익적 제안을 할 때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공무원 사회의 철벽'과 외로운 '투쟁',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분노와 항변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컴퓨터를 할 줄 몰라 직접 쓴 제안서와 신청서 등을 동주민센터나 부서 공무원에게 작성해달라고 해서 제출했고, 제출된 문서에 대해 오래도록 회신조차  없이 방치되고 있으면  다시 시청과 구청으로 찾아가 회신을 독촉해서 받기도 했다. 구로구청에서 받은 부서별 검토의견의 대다수는  가격표시제가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니며 표지판 설치에 많은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의견은 처음 들어온 것이며 개인의견이다…가격표시제는 과잉서비스'라고 말하는 구로구청 공무원과 말싸움을 벌이다 국장을 찾아가  "아직까지 이런 얘기를 하는 데가 있느냐. 그런식으로 지휘감독하느냐"고 항의하며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고 말한다. 

'찬밥'대우를 받아도 꿋꿋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고자 했지만, 그 젊은 공무원이 던진 '개인 의견'이라는 말은 아직까지 가장 큰 씁쓸함으로 남겨져 있다. 

하지만 지난 두달 동안  공공시설물에 대한 가격정보표시 의무화를 위해 뛰면서 새롭게 알게 되고 보람을 갖게 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어, 이영남 어르신의 활동도 탄력을 받고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서울시가 이미 지난 2011년 5월부터    '서울시 공공시설 및 공공건축물의 건립비용 공개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1억원 이상의 공공시설 및 공공건축물의 경우는 건립비용을 준공석 등에 명기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의 알권리에 부응하고 예산집행의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해서다.  

" 서울시는 이미 하고 있더라고요. 문제는 1억이나 고척돔구장처럼 수천억, 수백억 하는 건물들은 가격표시를 해도 우리 같은 일반 주민들은 그것이 적정한 것이지 알수 없어요. 하지만 수백만원하는 정자나 수십만원하는 체육시설, 벤치, 운동기구처럼  가격대가 낮은 것들은 주민이나 관련 전문가들이 보면 알수 있거든요. 그래서 생활속 공공기물등에 대한 가격과 시기 등의 정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 서울시 "제안 반영하겠다"
그가 들고 온  은빛 007 가방 안에서는  지난 2개월간 가슴과 발로 뛰며 주고 받은 각종 문서와 자료들로 꽉 차있었다. 이 가운데 이영남 어르신에게 힘을 주는 두 장의 공문이 있었다.

하나는 지난 10월 27일 서울시청을 방문해서  '공공옥외시설물 소요금액등 표기요청'과 관련해 시장과의 주말데이트를 신청한 것에 대한 회신공문이다.  지난 11월 중순경 온 이 공문에는 각 재산관리관을 통해 서울시 고유재산 관리대상 시설에 대해  재산명칭. 설치일자, 설치단가 등 재산현황표지를 부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또 서울시민들의 다양한 제안을 올리는 '천만상상 오아시스'난에도 이영남 어르신의 제안이 올려져, 지지하는 댓글이 잇따르고 있다.  

이어 지난 8일에는 서울시로부터 오는 19일 토요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주말데이트 일정이 결정됐다는 공문도 받았다.

"시장한테 이 얘기를 할 겁니다. 서울시에서 조례를 만들면 시 산하의 자치구에서도 모두 시행될 수 있나요?. 잘 되면, (서울시) 25개 자치구를 안 돌아다닐 수 있는데(웃음)." '투명예산'을 위한 그간의  노력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기대 반 설레임 반의 심정이 담겨있었다.
 
 ■ "제안자 없는 제안심사라니요?"
그러나 그에게 그 전에 아직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바로 17일(목) 오전9시30분에 구청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인 구로구 제안심사위원회와 관련된 것이 그것이다. 이 어르신의 제안과 관련해 부구청장을 비롯한 국장급 등 구로구청 공무원 10명이 참석해 심의를 하게 되는 날이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 있었어요. 제안자 참석여부를 물으니까 (제안)서류를 보고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간단한 취지와 내용을 담은 서류로 무엇을 어떻게 판단하겠다는 것인지. 제안자의 배경설명을 들어야 할 것 아닌가요?. 그랬더니 그러면  제안설명만 하고 나가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제안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결정되는지 투명하게 보여주어야지, 밀실에서 하겠다는 것인지".

구로구제안심사위원회에서 또 한번 황당함을 경험했다는 이 어르신은 "내가 내 집앞 도로개설과 관련한 민원을 낸 것도 아니잖아요.  직원 편인지 구민 편인지 내가 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부서별 검토 의견문에서 보듯) 과장들이 부정적이었는데, 국장이 직원 입장이지 민원인이나 주민 입장은 아니지 않을 것 아닙니까.언론도 잘 지켜봐주어야 합니다."

젊은 시절, 외국계 회사의 지사장으로 스웨덴 일본 등의 선진외국생활도 해보고, 영업책임자로 조달청 매매도 해본  오랜 사회 경험으로 우리 사회 저변의 명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보이는 이영남 어르신은 이밖에도 스크린도어 가격표시제의무화, 건강보험료  임플란트가의  비현실성 등 가격정보와 관련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내놓았다.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내가 앞으로 26년을 더 산다고 봐야지요. 앞으로 이런 것을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이 일을 할 때 난 가슴이 뛰어요. 쿵쿵". 

경륜까지 더해진, 열정과 정의감 넘치는  74세의 구로 주민이 지금 '우리'를 위해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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