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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82]가리봉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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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82]가리봉 짝사랑
  • 성태숙 시민기자
  • 승인 2015.05.03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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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람들도 가리봉에 산다고 말하려면 좀 창피하게 느껴요, 차라리 대림동에 산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어제 참석한 구로건강가정지원센터 운영위원회에서 이용자 운영위원으로 참석했던 한 중국인 출신의 다문화여성이 전한 말이다. 그 분의 이야기에 모두는 잠시 웅성거렸다. 2018년 건강가정지원센터는 다문화가정지원센터와 함께 가리봉동으로 이전을 할 수도 있다는 말에 말리고 싶다며 그녀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어젯밤 가리봉시장 버스정거장에서 남구로역 쪽으로 걸어오면서 보았던 술집 전경들이 떠올랐다. 대충 선팅을 한 가겟방에 한 줄 네온사인으로 어설프게 테를 둘러 장식한 술집 서넛을 지나며, 어쩜 구로공단이 있던 어릴 적 구로동에서 보았던 딱 그런 술집들이 이렇게 줄줄이 늘어서 있냐고 같이 걸어가던 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가리봉에서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퇴락하고, 그 속에서 술집들마저 70년대 언저리쯤으로 물러선 꼴을 하고 있었다.

그 운영위원은 또 대림동 부근에 성업 중인 중국 이주민들의 상업지를 가리봉동과 비교하며, 그녀가 막 입국을 했던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가리봉동이 누렸던 활기가 그에 못지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그저 어울려 사는 진통에만 겨워 몰려드는 게 걱정이지 떠나는 게 아쉬울까 하고 속 편히 생각했던 구로구의 오늘을 여실히 꼬집는 아픈 말이기도 했다.

늦은 밤 대림역에 내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영등포구의 대림동 버스정거장에 서서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다리 건너의 구로동을 바라볼 때 그런 정경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이지 않는 것 역시 그녀의 그런 말에 맥락이 닿아 있는 감정일 터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구청이 이런 일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이다. 가리봉동도 절치부심 끝에 무너진 재개발의 꿈을 접고 도시재생에 새로운 기대를 걸어보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난 월요일 가리봉의 도시 재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공개적으로 마련되었고, 우연히 소식을 듣고 잠시 갈까말까 망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리봉이 좋아지고 근사해지는 것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나 또 여러 모로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그건 내가 관심을 둘 만한 일은 아니란 생각에 그만두기로 하였다.

파랑새는 오랫동안 가리봉동에 관심이 많았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혹시 가리봉으로 갈 수 없을까 늘 애를 써보았다. 어디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가리봉동 아이들은 그곳으로 들어가 아예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없어 그런지 인연이 없어 그런지 결국 가리봉에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파랑새의 운영위원들조차 가리봉에 들어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교사들을 말렸다. 동네가 어떤 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철없이 군다고 걱정만 듣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곳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던 터라 소망을 했었던 것이다. 아직도 이름하나하나가 또렷한 바로 그 아이들 말이다. 아이들을 따라 어두컴컴하고 좁디좁은 단칸방으로 가정방문을 다녀오던 날이면 교사들끼리 아무 말 없이 그저 저 혼자의 속울음에 겨워하던 그 아이들이 바로 그 가리봉에 살고 있어서, 우리들에게는 늘 가리봉이 소망이었다.

하지만 만약 가리봉이 도시재생의 길을 걸어 훨씬 더 좋아지고 근사해진다면 이제 파랑새의 소망에서는 그만 놓아주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가리봉은 더 이상 파랑새가 꿈꾸던 그 가리봉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추녀를 혼자 짝사랑하다 그녀의 깜짝 변신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비칠비칠 뒷걸음질치는 소심남 같은 꼴이긴 하지만, 나보다 더 잘 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이들이 많을 테니 물러설 수 밖에다. 그것은 못난 사람의 못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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