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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66] 텔레비전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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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66] 텔레비전 호접몽
  • 성태숙 시민기자 (구로파랑새나눔터 지역아동센터장)
  • 승인 2014.12.23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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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에는 무조건 일탈이다. 밤늦게까지 텔레비전도 보고 책도 읽고 뒹굴거린다. 내일은 아무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일요일이란 생각에 나른하다. 뭐든지 내일로 미룬다. 내일은 하루 종일이 있는 날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새벽까지 오만 짓을 하다 늦게 잠이 들면 일요일 오전이 다갈 무렵에야 겨우 깬다. 아침 겸 점심을 대충 먹고 다시 눕는다, '좀만 있다 미룬 일을 해야지.' 너무 행복하다. 그 동안 피곤했다는 생각에 온 몸이 천근만근이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눈꺼풀이 자동으로 다시 내려온다. 언제 잠이 드는지도 모르고 스르르 잠이 든다.

배가 고파 일어나보면 5시 가까이다. 아까 도서관이라도 다녀올 걸 후회가 막급이다. 지금 가서 책을 빌려올 수 있을까 망설여진다. 그러나 배고픈 게 우선이다. 집 안에 뭐라도 먹을 게 없나 닥치는 대로 먹고 본다. 배가 부르니 다시 만사가 귀찮다. 도서관도 그냥 패쓰다.

시간은 벌써 리얼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작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눈과 손은 다급히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아 방 안을 뒤적거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해야 할 일을 미뤄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텔레비전을 켜면 일은 완전 뒷전이 될 게 뻔하다. 이제 일요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시작해도 사실 빠듯하다. 아니 며칠 전부터 해도 사실 될까 말까한 일이었다. 하긴 해야겠는데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마성은 너무 강력하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억지로 다독거리기 시작한다. 아까 잤잖아? 좀만 보고 이따 열심히 하지 뭐. 아까 자서 잠도 안 올 텐데 걱정할 것 없어. 안되면 텔레비전을 켜놓고 슬슬 시작하면 되잖아. 스스로의 꼬임에 잘도 넘어간다.

결국 이렇게 또 타협이다. 텔레비전과 노트북의 전원을 함께 켠다. 그러나 노트북에는 손만 올려놓고 눈은 텔레비전에 박혀 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다 어느 틈에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본격적으로 시청자 모드에 돌입한다. 재미가 있는 만큼 괜히 화가 치민다.

이렇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미뤄둔 일이 어찌 될까 불안한 마음도 크다. 하지만 일요일 하루 이렇게 쉬는 것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성질이 나기도 한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쏟아지는 상황이 원망스럽다.

물론 텔레비전을 켜두고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때로는 그러다 일에 더 흥미가 생겨서 아예 텔레비전은 뒷전이고 휴일 내내 일만 하다 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해내야 하는 일은 절대 텔레비전을 켜놓고 할 수가 없다. 생각의 가닥이 잡힐 듯 말 듯할 때는 특히 그렇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아련한 무언가의 윤곽을 잡는 일이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이틀 내내 텔레비전과 씨름을 하고 나면 그 다음 주 월요일은 특히 힘이 든다. 가끔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발걸음도 휘청거린다. 단순히 밀린 일 때문만이 아니다. 이틀 내내 허상의 삶에서 붕붕 떠다니던 감각들을 현실 세계에 다시 맞추느라 힘들다.

휴일은 원래 잘 쉬고 기력을 회복해서 다시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노동 재생산의 기회를 마련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터가 아닌 휴식을 취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 인간은 그 유명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말대로라면 휴일 집에 있을 때 자신에 대한 실체감을 더 충실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원기회복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묘하게 이런 흐름을 방해한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이틀간 완전 새로운 허상의 삶을 살게 하고 있는 대로 기력을 다 빼놓는다. 마치 호접몽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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