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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노점상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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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노점상 아주머니
  • 성진아 시민기자
  • 승인 2012.06.26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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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째 오류동서 양말 판매... 1만권의 책, 동네책 독파

 # "도대체 저분은 누굴까?"
 서울 오류초등학교 진입로 부근, 아이스크림점 바스킨라빈스 앞에서 양말을 파시는 이동상인 아주머니 김형옥 씨(오류1동, 58).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그 자리에서 양말을 팔고 있다. 올해로 13년째.


 오류동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출퇴근길에 혹은 장을 보기 위해 오가는 길에 한번쯤은 뵈었을 것이다. 양말 파시는 모습과 함께 책 읽는 모습을.


 숨이 콱콱 막히는 한여름 땡볕에서도, 이리저리 갈피잡지 못하고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에도, 종종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르게 하는 혹한에도 책 읽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책을 맛나게 읽는지 누가 다가가 일부러 말을 걸기 전까지 책에 몰두해 있다.


 "집에 1만권의 책이 있었는데 모두 몇 번씩은 읽었어요. 만화책을 제외하고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 읽어요."


 한 때 책대여점이 유행인적이 있었다. 오류동 근처 책대여점의 책은 다 빌려다 봤다.
 "지금은 인근 병원 간호사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줘요. 그걸 읽어요. 신문도 읽고, 은행에 놓여 있는 잡지도 읽고요."
 책읽기가 그리 재미있을까.


 # 접어야 했던 간호사의 꿈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았어요. 세계 명작을 읽고 또 읽었죠. 책 읽으라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요." 아주머니의 꿈은 간호장교였다. 할아버지의 단호한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고 독일 간호사로 지원하려 했지만 이도 쉽지 않았다.


 결혼 전 보육원과 교회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했다. 손 글씨가 보기 좋아 아이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대자보에 즐겨 쓰곤 했다.


 교회 아는 분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호텔에서 일했고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임신 8개월 만에 조산을 했다.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의존했지만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뇌에 손상을 입었다. 정신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시련은 연달아 왔다.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자궁 적출수술을 받았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됐다.


 장애아에 대한 이해나 복지가 전무했던 80년대 도움 받을 곳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스스로 장애교육을 공부해야 했다. 없는 살림에 이화여대 사회교육원 장애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전문책 살 돈이 부담스러워 깨알 같은 글씨로 베끼다시피 공부를 했다. 그리고 동네 목공소에서 쓰다 버린 짜투리 나무토막을 주워 아이를 위한 교구를 만들고 책을 읽어주고 또 읽어주기를 반복하며 아이를 교육시켰다.

 # 오류동과의 인연 12년째
 89년 성베드로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면서 90년 오류동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가 입학하면서 이동상점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필요한 돈이 턱없이 부족해 생활은 늘 팍팍했다. 여러 가지 부업과 오징어구이판매를 거쳐 지금의 이동상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호텔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제과점으로 경비로 일자리를 여러 차례 바꾸었지만 하는 일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금은 일자리가 없어 집에 있다.


 하루 종일 거리에서 장사로 지친 몸이었지만 아이를 가르치는 것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한글을 모르던 초등 1학년생이 6학년이 되어서는 동화책을 즐겨 읽게 될 때까지 책을 읽고 또 읽어주었다.
 
 # 새벽에 걸려온 전화한통의 '비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고 학교도 졸업했지만 아주머니의 건강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심장이 좋지 않아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갔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소원은 아이보다 하루 더 사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자꾸 아프니 덜컹 겁이 났어요. 내가 잘못되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나."


 생계를 위해서는 이동상점을 열어야만 했다. 아들과 같이 있어 줄 수 없었다. 정신지체장애로 아들의 취직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 아들을 아무도 없는 집안에 하루 종일 가둬 두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마음은 편하지 않았지만 시설로 아들을 보내기도 했다. 많은 곳을 알아보고 또 알아봐 좋은 곳으로 그렇게 아들을 보냈다.


 4년이 흐른 어느 날 기분 좋지 않은 꿈을 꿨다. 그 기분은 하루 종일 길가며 시장이며 집이며 따라다녔다.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벨소리를 듣는 순간 갔구나 싶었어요."
 간질이라 했다. 건강했던 아들에게 간질은 거짓말처럼 들렸다. 경찰이 부검을 권유했다. 어떻게해도 살아오지 못할 거라면 부검은 하지 않겠다했다. 부모와 떨어져 두려움에 떨며 죽어간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졌다. 그런 아들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 '책' 날라주는 백의의 천사
 가슴에 묻은 아들과 매일 거리로 나와 양말을 팔아 온 지 3년.
 집에 있으면 아들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 이동상점을 연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얼마 전에는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다시 읽었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새로워요. 예전에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다른 것을 느끼는 새로운 재미가 있죠. 그래서 읽었던 책도 또 읽고 또 읽고 해요."


 요즘은 김훈의 신작 '흑산'을 읽고 있다. 병원 간호사가 빌려 주었다. 간호사도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매주 책을 빌려다준다. 고맙다.


 인터뷰를 마치며 수줍게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본인의 사연을 누가 읽겠느냐며 "그저 내 넋두리 들어줘 고마워요" 하신다.


 맞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서로의 사연을 공감하면서 사람은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을 이번 취재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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