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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11]개봉동 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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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11]개봉동 학산
  • 김윤영
  • 승인 2006.06.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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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요충지
▲ 개봉동 웨딩프린스에서 바라본 학산

큰 장마가 있던 어느 해, 어디선가 자그맣고 동그란 산 하나가 물살에 떠내려와 논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그렇게 생겨난 산에 백로가 날아와 서식하면서 이 산은 ‘두루미산’이라 불리워지게 됐다고 한다. 개봉동 산 21번지 개봉공원(한영신학대학교 뒷산). 주민들의 입 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다.

지금은 두루미산이라 불리기보다 개봉공원, 학산(鶴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되고 있다. 학산은 개웅산과 매봉을 잇는 중간에 있는 얕은 능선이라고 볼 수 있는 작은 산이다. 좌우로 경인선 철도와 남부순환로, 경인로가 동서로 횡단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이 산은 6ㆍ25 동란(動亂 난리) 당시에 수도권 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을 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ㆍ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의 성공으로 인천과 부천을 탈환한 UN군이 맹렬한 기세로 진격해 올 때 인천과 서울을 잇는 중요한 병참보급로였다. 또 기계화부대(機械化部隊 전차·장갑차·자동 화기 등 기계의 힘을 최대로 이용한, 기동성이 좋은 근대적 부대)의 유일한 통로 구실을 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최후 저지선을 구축하고 끝까지 저항했으나 UN군이 어렵지 않게 격멸하고 영등포를 넘어 서울을 장악했다고 전해진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학산은 물살에 떠내려 와 논 한가운데에 자리할 정도로 작은 산이어서 학산을 점령하면 서울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두루미산에서부터 찾기 시작한 학산의 유래에는 향토사를 넘어서 더 많은 우리의 민족사를 담고 있었다. 언제부터 산이 여기에 위치해있는지 그 첫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지만 구로가 생기기도 전부터 그곳에 서서 대한민국의 역사의 흐름과 함께해 왔던 곳이다. 그냥 지나쳐만 가던 산 하나가 이 짧은 이야기 하나로, 역사의 흔적이 묻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 이젠 볼 때마다 아픈 민족의 역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참고서적]
향토사수탄 (김정진 편저, 1995년)
한 권으로 보는 전쟁사 101장면 (정토웅 지음, 1997)
동명연혁고 구로구편 (서울특별시, 1990)
구로구지 (구로구 발행,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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