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의 추억 항동의 유산 4_사람들]"항동마을 참 살만한 곳이었지"

2013-12-09     구로타임즈 기획취재팀
▲ 지난11월 중순 최영달씨(69) 생일날 골목풍경.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집앞 골목에 동생과 가족, 이웃들이 모여 오가는 술한잔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쩌면 항동에서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골목잔치다.

항동 마을사람들을 만나봤다. 지난 9월부터 11월말까지 두달동안 본지 기획팀 기자들은 항동보금자리지구로 지정된 안쪽 마을 골목골목을 누비며 항동에서 삶의 터전을 일궈온 많은 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항동마을의 집성촌 역사를 만든 김해김씨 집안 부터, 항동에 관한한 과거와 현재를 구슬처럼 꿴 한권의 향토사처럼  술술 읊어댈 수 있는 60, 70대 어르신들, 사업이 망하면서 눈물로 들어온 입성기를 가진 어르신들 등 다양하다.

마을과의 인연, 마을과 이웃에 대한 추억, 개발로 인한 고민, 항동의 미래를 위한 제언 등.
'항동'이란 그릇속에 담은 무지개 빛 이야기들을 폭넓게 들어봤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서막, 항동의 유래와 변천
 2. 항동사람, 평생을 살다 1
 3. 항동사람, 평생을 살다 2
 4. 항동사람, 오늘을 살다
 5. 항동마을  문화생태지도
 6. 항동의 꿈, 항동의 기록


 

"여기서 살다가면 좋을텐데"
  ■ 김영봉· 권일순  어르신

항동 개미슈퍼 앞에 내려 맞은편 골목길을 따라 맨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요즘 서울에서 보기 드문 나무 대문의 기와집이 나온다. 바로 항동마을의 시작이 된 김해김씨 경사파 참판공 종가인 김영봉(81) 마을노인회장의 집이다. 김 회장이 7살 때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하니, 올해로 74년이 된 집이다.  

 "이 집을 중심으로 100m일대가 김씨네였어.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안쪽)마을의 30여가구중 20여가구가 우리집안이었지. 항동산신제에 올리는 정화수를 긷기 위해 이용하던 항동우물(뒷골우물)도 우리가 처음 판 거야. "

 김회장은 보금자리개발에 대해 한마디로 "쫓겨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아파트서 어떻게 살아, 나는 단독에서 살거야. 그래서 항동에서 가까운 오류동쪽으로 알아보고 있어".

 21살에 종가집으로 시집와 57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 권일순(78)씨가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고향을 떠나면 낯익은 사람도 없고, 거리서 만나 얘기할 사람도 없지. 할아버지는 떠나지 않고 여기서 살다 가면 좋겠다고 늘상 말씀하시는데...". 평생을 쌓아온  정을 나눌 이들이 뿔뿔이 헤어져야 하는 현실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옛날엔 늑대도 있었지"

      김영서 어르신
   

김영서(62, 남) 어르신은 항동 김해 김씨 9대손으로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라면 아직도 빠삭했다. 항동에 마을버스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게 1977~78년 무렵이라는 것도, 전기가 들어온 건 서울로 편입된 이후라는 것도 모두 김 어르신의 또렷한 기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인 1950년대 말 마을에서 늑대를 봤던 기억, 내천에서 고기 잡고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추억.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즈음 마을로 밀려들어온 철거민들의 삶에 대한 목격까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김 어르신은 "우리 윗세대 같은 경우는 여기가 모든 것의 전부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여기서 모든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라며 개발을 통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될 분들이 고사해 가는 나무와 같은 처지가 될까봐 걱정했지만 항동이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김 어르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김 어르신에게 항동에 대한 추억은 아직 과거의 것만은 아니었다. 김 어르신은 "마을이 개발이 되더라도 역사와 문화를 남기고 알릴 수 있는 기념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관련기사 _ 항동사람들 >

■  기획 취재팀
       김경숙  기자
       윤용훈  기자
       박주환  기자
       신승헌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