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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단지]문학작품속에 드러난 아! 구로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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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단지]문학작품속에 드러난 아! 구로공단
  • 송희정 기자
  • 승인 2006.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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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② - 명과 암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 <중략> …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이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원짜리 티샤스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난다고 한다.
-박노해 ‘가리봉 시장’ 중에서-


- 노동자 출신 문학인들의 체험 통한
- 구로공단 당시 현장성 생생히 기록


누군가 읊어주는 이 시를 눈을 감고 듣노라면 80년대 중반 가리봉 시장 골목골목에 빼곡히 들어선 포장마차들과 그 앞을 분주히 오고갔을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정겹지만 어딘가 쓸쓸한 풍경들이 마치 한편의 영상처럼 되살아난다.

구로공단지역 특유의 현실은 80년대 이후 등장한 노동자 출신 문학인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구현돼 왔다.

구로공단 인근의 어느 단칸방에서 미싱사로 일하며 가난 때문에 집을 나간 전남편을 대신해 아들을 홀로 키우는 강필순<공선옥『수수밭으로 오세요』>에서부터, 시골에 가족을 두고 서울로 상경해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던 ‘나’<신경숙『외딴방』>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 속 구로공단의 사람들은 돈 없고 배운 것 없어 유일한 재산인 몸뚱이를 놀려서 먹고 살지만 비루한 삶속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게 삶을 영위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인간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소설들이 10~20대에 구로공단에서 미싱사로 혹은 여공으로 일하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문학 작가의 꿈을 키운 작가 본인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 졌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작가 개인의 관념적인 문학취향이 아닌, 고된 삶 한 가운데에서 솟아나온 자기정체성의 힘겨운 모색이었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에 의미 있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원행 전철이 통과하는 전철역이 그 동네의 시작이다. 전철역 앞에서부터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길은 세 갈래였어도 어느 길로 접어드나 공단과 연결되었다. 그 집으로 통하는 좌측 길만 사진관과 보리밭다방 사이로 골목이 또 있었고, 그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중략…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벽돌집.
-신경숙 『외딴방』중에서-


구로동과 가리봉동 토박이 주민이라면 작가가 그리는 풍경이 구로공단 일대에 들어섰던 일명 ‘벌집’이라는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1960~1980년대까지 구로공단에 유입됐던 노동력은 주로 미혼여성들이었고, 이들의 손에 쥐어진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바깥의 주거형태는 ‘벌집’이 유일했다.

작가 신경숙 역시 80년대의 어느 몇 해 동안은 구로공단의 미혼여성 노동자로서 일터 가까운 곳의 어느 ‘외딴방(벌집)’에 거주하며, 아침나절에는 줄을 서 공동화장실을 이용하고, 월급날이면 가리봉 시장 일대 먹자골목을 상기된 얼굴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며 활보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구로공단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봉순 언니』의 작가 공지영도 1987년 구로공단 근처의 전자부품제조업체에 취업했다가 한 달 만에 ‘위장취업’한 것이 탄로나 강제로 퇴사 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또 한사람,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 역시 1970년대 구로공단에서 일당 130원짜리 직공 ‘시다’ 노릇을 한 인생경험이 있다.

사실 기성 문인집단들의 작품 외에도 구로공단지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들은 많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싹튼 노동자들 사이의 창조적 표현행위는 노동자 수기, 글 모음 등 다양한 형태로 그 기록이 남아있다.

"
언니처럼 12시간 14시간 일만 하는 공순이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라던 언니의 뼈저린 한 마디가 어떻게 너를 자극시켰을까. 동생아 그건 푸념이었다. …중략… 노동에 질리고 가난에 질린 하소연이었다. 사랑하는 동생아.
-정명자(동일방직) ‘동생에게’ 중에서- "


이른 새벽 눈을 떴다면 첫 버스를 타고 구로동 114번 구 종점 언덕으로 가보라. …중략… 그 곳에 내가 있다. …중략… 그 무시무시한 IMF 이후에는 거짓말처럼 일거리가 뚝! 이었다. 일거리가 없어지자 일당은 절반으로 삭감되었고, 노동시간은 오히려 늘어났다.
-한정희 ‘인테리어 목공의 노동일기’ 『우리식 감성인생』(삶이 보이는 창) 중에서-

이 시기를 다룬 노동자 수기나 글 속에는 당시 구로공단 생산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삶의 아픔이 생생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실제 구로공단을 가동시킨 힘의 원천이었던 수많은 여성노동자가 열악한 노동환경에 좌절해 ‘배움’에 집착하는 모습이나, 한 가정의 가장이 외환위기로 인한 고용불안에 힘겨워하는 모습 등은 당시 이곳의 주민들이 가졌을 보통의 정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생산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이 받았던 사회적 냉대와 차별이,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기능했음에도 낙후의 이미지로 못 박힌 구로구의 ‘그림자’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정리되는 건 필자의 단순한 억측일까?

기획취재팀 : 송희정 기자
shj@kuro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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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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