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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21]가리봉5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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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21]가리봉5거리
  • 김윤영
  • 승인 2006.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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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 명암이 녹아있는 곳

1967년 2월,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회에서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에 제2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던 그 때부터였을까? 가리봉5거리로 대표되는 가리봉동의 역사는 쉴 틈 없이 변화하고 변화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가리봉 오거리는 문학, 영화 등 역사의 기록물 속에서 여공, 쪽방, 낙후, 조선족 등의 소재와 함께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골 소재가 되어 왔다. 너무 익숙한 ‘가리봉=공단’이라는 수식어에 가리봉의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그 껍질 속에는 산업과 값진 노동의 역사가 숨어있다.

가리봉동은 1967년 구로제2공단 조성이 논의된 이후인 다음해에 제1회 학국무역박람회 개최장소로 선정된 곳이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행정당국과 긴밀한 협조아래 총 12만평의 공단이 조성됐다. 그리고 의류제조, 가발제조, 섬유가공, 전자제품 등의 기업이 입주했다. 이후 80년대까지 한국 산업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90년대 공단의 공장들이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전까지 노동의 중심지로 커온 곳이다.

그 와중에 80년대 초부터 크고 작은 노동쟁의(근로조건에 관한 노동관계 당사자간의 주장의 불일치로 일어나는 분쟁상태)가 일어났고 80년대 후반에 대규모 노동쟁의로 확산돼 근로조건개선을 위한 활발한 활동이 벌어졌다.

85년 6월 24일 벌어진 최초의 노동자 연대파업이자 노동자와 진보사회 운동가들이 연대한 사회 민주화 투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구로동맹파업이 그것. 민주노동운동 깃발아래 모인 노동자들이 쇠파이프와 몽둥이에 맞서 싸우며 노동의 역사를 새로 쓴 곳이 바로 가리봉동이다.

구로공단과 노동자들의 문화공간이던 이곳은 90년대 중반부터 공장의 노동자들 대신 중국동포들의 해방구로 사용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금은 텅 비어있는 상태. 공단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첨단산업단지로 거듭나기 위한 가리봉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진행 중이다.

공장 노동자와 그들의 투쟁은 역사의 뒷 켠에 묻힌 지 오래.

최근 관내 성공회대를 중심으로 이들의 역사를 기록할 노동박물관 건립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하니 지역과 노동의 역사를 당당히 자랑할 그 날이 어서 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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