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거의 신문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신문을 뺀 국내 일간지는 더욱 그렇다. 어지간한 뉴스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끝내고, 상세한 정보가 필요한 정치 이야기 등은 유튜브 방송을 챙겨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때는 아들로부터 "엄마도 신문 봐요?"란 엉뚱한 질문을 받을 만큼 신문을 챙겨본 적도 있었는데 격세지감이다.
그런 인생인지라 최근 알고리즘의 포로가 된 듯하다. 보고 싶지 않아도 어떤 유튜브 내용들은 봇물처럼 쏟아진다. 최근에는 일본 강제징용피해보상 관련한 소식이 그러하다.
제3차 피해보상안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은 것으로 안다. 개인과 국가, 피해자와 가해자,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선뜻 찬성하고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전환의 시대를 맞이한 기분이다. 그러나 변화는 매번 아무런 준비도 되지 못한 채 외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어나는 것만 같다. 억지로 또 다른 문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느낌이라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코로나 시국을 맞이할 때도 그랬다. 한 번도 마스크란 것을 쓰고 살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챙겨서 씌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마스크 안 쓰고 다니면 벌금을 많이 낸단다"라는 협박을 하고서야 마스크 쓰기의 물꼬를 틔울 수 있었다.
이제 20일(월)부터 대중교통에서도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 있도록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하는 이 마당에 이번에는 또 마스크를 벗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 번 마스크에 길들인 아이들은 결코 마스크를 벗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낯설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생겨날 정도다. 마스크는 어느새 안전지대처럼 아이들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얼마나 적응이 빠르고 또 한 번 적응한 것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전환은 더 빠르고, 더 흥미진진하고, 더 편안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동조가 클 때 더욱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잘 보이지도 않는 신문을 읽는 것보다는 생생한 화면과 음성이 들리는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보는 것은 적응이란 말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빠른 전환을 끌어낸다.
하지만 대대손손 억울한 감정을 가지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온 일을 하루아침에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런 방식에 숨은 뜻이 있어 '결국 이런 좋은 점을 위해 우리가 그렇게 입장을 변화해야 했던 것이구나'하고 뒤늦은 깨달음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스크도 마찬가지다. 기온도 점점 오르고 있는데 아무리 권해도 마스크를 벗을 엄두를 못 낸다.
물론 어쩌다 마스크를 벗고 지내기 시작한 아이들은 조금씩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내는 편안함을 알고 적응해가기 시작한 듯하다.
하지만 무엇이 좋은지 끝내 알고 싶지 않은 듯 완강함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전환은 이렇듯 혼란과 미련이 짝이 되어 함께 온다.
혼란과 미련 대신 지혜와 용기가 짝을 삼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