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사이로]구로동의 여름나기

2023-07-07     성태숙 시민기자

 

엄청나게 퍼부을 것이라던 소식에 비하면 최근 내리는 비는 시늉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기도 두려운 까닭은 일단 마음먹고 내린다면 그 위용이 어떨지는 가히 짐작도 못할 바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상악화로 세상 곳곳에서 기후 재난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이므로 함부로 입방정을 떨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한다.
 
올해 파랑새에는 1학년(초등학교)들이 제법 들어왔다. 처음에는 서너 명에 불과할 것 같더니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를 다 그리고도 맨 마지막에는 반짝 햇님까지 떴다. 1학년들이 이렇게 우루루 들어오니 매일매일 할머니 오리처럼 꽥꽥거리며 몰고 다니기 바쁘다. 

1학년 아이들은 '괜찮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바깥이 뙤약볕으로 펄펄 끓고 있어도 '나가 놀기 괜찮단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도 '물론 괜찮다'고 한다. 어째서 계속 괜찮기만 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괜찮다면 괜찮은 거다. 

며칠 전에도 하루종일 오락가락 비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내리던 날이었다. 1학년 몇 명이 이만하면 '나가 놀기 괜찮은 날씨'라며 나가 놀겠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어른들은 혹시나 싶어 아직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창밖을 가리켜 보았지만 그런 게 통할 리 만무하다. 결국은 우산을 집어 들고 1~2학년 몇 명을 데리고 나왔다.
 
모두가 '해방의 용사'가 되어 진격해 간다. "근데 너 공부 다 했어?" 해방의 용사는 당연히 자신의 적을 무찌르고 나오는 법이라는 식이다. "응! 나 다 했어," 상대도 거침없이 응수한다. '나도 자유의 몸이 될 자격이 있다'라는 듯 여기저기서 "나도! 나도 다 했어!"라며 뿌듯한 응대가 이어진다. 

그런데 갑자기 "어, 난 아직 안 했는데..." 찬물을 확 끼얹는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는 일순 긴장한다. "그럼 나중에 꼭 해." 벌써 5시가 넘어가는 시각이다. 과연 가능할까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모두가 해방의 용사인 줄 알고 나왔는데 어쩌겠는가? 용사가 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고 볼 밖에다. 
 
구청 쪽에서 길을 건너 아트밸리 앞으로 진격이다. 비는 오지만 공을 챙겨온 것은 여차하면 제법 널찍한 지붕이 있는 아트밸리 앞에서라도 잠시 공놀이를 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다. 

물론 이런 짓은 벌써 해봤고 건물을 관리하는 분께 야단을 맞고 쫓겨난 적도 있어 별로 가능한 수는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또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잠시만이라도 아이들이 비를 맞지 않고 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아트밸리에 도착하니 올곧은 1학년들은 인공잔디가 깔린 작은 운동장에서만 공을 차야 한다고 고집이다. 비록 비도 오고 땅도 질펀하지만 공을 운동장에서 차자는 이치에 맞는 말을 거스를 도리가 없어 일단 나는 '최강의 골키퍼'를 자처한다. 
 
나는 '최강의 골키퍼'이긴 했지만 잠시 후 화장실이 급해졌다. 구민회관의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구루지에서 '헝가리'와 관련한 최신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것을 봐버렸다. 

우리 팀은 오로지 1명의 선수가 골키퍼도 없이 온몸으로 공을 상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는 구루지를 살펴보고 재빨리 상대 팀의 선수들을 구루지로 유혹해오기 시작하였다. 우리 팀의 1명의 선수가 1학년이 전부 빠져나가고 자신과 같은 2학년 선수를 상대로 1대1의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말이다. 
 
뭐 이런 구로동의 여름도 괜찮지 않은가? 헝가리 전시는 흥미로운 점도 많았으므로 여러모로 정말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