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사이로 1] 새해 첫 산책

2020-01-10     성태숙 시민기자

 

지난 일요일 근 반 년 만에 푸른 수목원(항동)을 찾았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기 직전에 수목원을 산책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어쩌면 발길을 끊은 지 반년도 더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길이 한참 낯설었다. 성공회대 뒤편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서 수목원으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 길이 낯설게 느껴질지 몰랐다. 분명 수목원 초입에 다다른 것 같은데 좀체 익숙한 광경이 보이질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낯선 길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다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고 겨우 수목원 입구를 발견했다. 그저 겨울풍경이었던 것이다. 나무들이 앙상해지고, 꽃과 잔디가 사라진 맨 땅이 드러난 풍경이 낯설어 그만 출입구를 못 찾고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목원을 들어서서도 그런 기분이 금방 가시진 않았다. 그 동안 정돈도 되고 새롭게 들어선 조형물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겨울 수목원의 황량함이 마치 전혀 알지 못했던 곳을 와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길 건너편 개발지에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이미 장사를 시작한 가게도 있어 예전의 조용하던 모습조차 사라져 더 그런 느낌을 더했다.

그나마 호수를 둘러싸고 그린 듯이 서 있는 억새풀들이 있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겨울 호수는 살짝 살얼음 모습이었지만 올해 겨울 찬바람이 그렇게 매섭지 않았던 듯하다. 땅도 메마른 손등을 갈라놓듯 쩍쩍 갈라진 모습은 아니어서 이제 엄동설한이라는 말은 언감생심인가 싶었다.  어떤 나무들은 지난 영광을 고스란히 벗어던지고 메마른 나무껍질 하나로 이 한겨울을 그대로 버텨내려는 심사인 듯싶다. 또 어떤 나무들은 채 떨치지 못한 이파리들을 어정쩡하게 겨우 달고 서있다. 여름 초입의 길고 시퍼렇게 날이 서 하늘로 향하던 기개는 이미 어디에도 없다.

산책길에 나섰던 시각은 이미 오후도 한참 지난 때였다. 새해 벽두부터 책상머리를 붙들고 앉았지만 괜히 마음만 울적해져서 길을 나섰던 참이다. 무언가 잘 마무리를 못하고 한 해를 보낸 마음에 아쉬움만 가득해서 기분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산을 오르고 수목원을 한 바퀴를 돌면서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것이 사실이다. 나무 데크 위를 울리는 걸음 소리가 명쾌하게 들리며 흐릿했던 머릿속도 조금은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올 해 첫 산책길이 열리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몇 페이지를 재미나게 읽다가 놔둔 곳을 몰라서 잠시 중단하고 있는 소설책에서 주인공이 읊조리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는 서른이 되도록 하는 일 없이 백수로 살다, 집에서 쫓겨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산 속 정자에서 막 하룻밤을 지내려던 참이었다. 산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정자에 누워 그는 '산 속에서 어둠은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와 확 덮쳐버린다'며 오금을 떨던 장면이 있다.

다시 산을 넘어서 성공회대 쪽으로 넘어갈 결심을 하던 나는 이 구절을 떨쳐내지 못했다. 산에서 어둠은 사방에서 갑자기 확 덮쳐온단다. 저 산을 넘어야 하는데...사위는 이렇게 벌써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마음은 조급해지지만 산책길에 느긋했던 발걸음을 갑자기 재촉하기란 또 그게 쉽지 않았다.

산길을 오르며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뒤편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자꾸 맘에 거슬린다. 쓸데없이 두렵고 초조한 기분이 들어 아예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가 내 앞을 분명히 지나갈 때까지 차라리 기다리기로 한다.

이렇게 한 해가 또 시작될 것이다. 느긋하게 시작했던 걸음은 어느새 닥쳐온 어둠에 초조한 발걸음으로 바뀌어 걸음을 재촉할 터이다. 그래도 나는 첫 산책을 나왔던 마음을 잊지 않고 올 한 해를 느긋하게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