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우리동네 이야기 29]가리봉교회

' 내 나이 아흔 '… 한국 근현대사 점철

2015-08-14     박주환 기자

가리봉동에 소재한 가리봉교회가 지난 5월 24일 구로남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창립 90주년 행사를 가졌다. 1925년 11월 경 양평동교회의 유재한 목사 주재 하에 하마련 선교사가 첫 예배를 가진 이후로 오늘까지 거의 한 세기에 다다랐다.

하마련 선교사가 가리봉에서 첫 예배를 열게 된 이유는 1925년 을축년 홍수 때문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몰아닥친 홍수 피해로 가리봉 지역 주민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 만물장사를 하던 영등포 지역 양평동교회의 노경빈 장로가 이 모습을 보고 하마련 미국 선교사에게 참상을 전했다.

 

1942년 현 가리봉교회 부지에  신축했던  기와집 교회당.

 

▲ 1984년 증축한 가리봉교회 현교회당

 

이들은 안양천에 둑을 쌓는 등 수해복구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주민들에게 좁쌀 등의 식량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바로 가리봉교회다. 첫 예배는 성도 조영덕의 집에서 이뤄졌는데 지금의 가리봉교회(가리봉경로당 맞은편)로부터 구로남초등학교 방향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고 한다.

가리봉교회에서 1996년 발간한 '가리봉교회 70년사'에서는 "가리봉리의 사태는 전역에 걸친 심각한 상태였다. 일행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가지고 간 음식을 나누어 주면서 굶주려 누워 있는 36명을 선교회에 우선 보고했다. …… 어느 한 노인은 너무 허약해서 서있을 수 도 없었고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고 기어 나와서는 실신했다. 깨어난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며칠 동안 울기만 했다고 했다"고 전한다.

이후 가리봉교회는 1927년 9월 초가 6간 교회당을 건축했고 15년가량이 지난 1942년에 현 가리봉교회의 위치에 12간 기와집 교회당을 신축했다. 당시로부터 약 4년간 전성천 목사가 시무했다. 전 목사는 후일 이승만 정권에서 공보실장을 맡아 경향신문의 폐간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더 이후엔 성남지역에서 판자촌 영세민의 권익을 위한 구호사업에 투신한다.

일제강점기엔 교회당을 포교당이라고 이름을 바꾸게 하고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한국교회의 대대적인 탄압기였다. 당시엔 야간집회도 금지됐다. 하지만 가리봉교회는 일요일과 수요일 저녁예배를 거르지 않았음에도 큰 문제 없이 암흑기를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교인들은 가리봉교회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역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 무렵엔 청년 교인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 고향을 떠나온 구로공단의 직원들이 마음의 휴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가리봉교회의 남궁원 관리장로는 "고향을 두고 온 청년들이 서로 위로하고 애환을 나누는 모임을 교회에서 많이 가졌다"며 "당시엔 외출이 어려운 직원들을 위해 교회가 회사들과 협의해 각 회사에 지회를 만들어 예배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교회에 마음을 의지했던 청년들은 이제 40~50대 중년이 돼 지금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올해로 90돌을 맞은 가리봉교회는 여전히 지역사회 활동에 힘쓴다. 매년 1~2회씩 불우이웃을 위해 쌀 100~200포대 가량을 지원하고 겨울이 다가올 때쯤이면 김치도 만들어 전달한다. 매주 독거노인 20가구에 반찬과 소액의 생활비를 전해주는 것도 교회가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활동이다.

90년 전 일제강점기 때 홍수피해로 허덕인 주민들에게 힘이 됐던 가리봉교회는 지금도 지역과 호흡하며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