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우리동네 이야기 26]구로공단과 ‘성쇠’함께 한 야학

구로공단과 ‘성쇠’함께 한 야학

2015-05-30     박주환 기자

구로공단이 번성했던 1970~1980년대, 구로지역의 야학도 이 시기를 즈음으로 번창하고 쇠퇴했다. 1970년대엔 구로제일야학, 한민교회야학, YMCA야학 등 다양한 야학들이 활동했지만 1979년 서울시 교육위원회가 비인가 사설 강습소라는 근거를 들며 이를 폐쇄시켰다.

구로구의 대표적인 노동야학으로 손꼽히던 야학은 한얼야학. 한얼야학이 구로지역으로 이전해온 것은 1970년대 후반 즈음이다. 영등포의 한 봉제공장에서 시작된 한얼야학은 구로 지역 성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지역 노동운동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의당의 심상정 국회의원도 대학교 1학년 시절 한얼야학의 교사를 했고 이후 구로구의 대우어패럴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국의 야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도권 교육에서 멀어진 노동자들의 검정고시 입시를 위한 모임으로 기능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며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과 교육을 위한 이른바 노동야학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의 본래 이름인 '수출산업공단 제1단지'가 조성된 1964년 이후 이곳엔 공장들과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로 봉제, 전자기기, 광학기기, 가발, 합성수지 제품 등 다수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가난한 농촌 지역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와 발을 딛은 곳이기도 했다.

야학은 이처럼 배움을 원하지만 제도권 교육의 수혜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주야간 고된 업무를 견뎌내야 했던 당시의 노동 여건상 주경야독도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목표로 삼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야학 교사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사회를 보는 시각을 키우는 일이 더욱 시급했다고 봤으므로 당시 대부분의 교육은 노동법을 비롯해 정치, 경제, 시사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당시 구로지역에서 사회운동을 해왔던 구로3동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의 이화복 원장은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 초중반 다양한 운동권 학생들이 구로공단 곳곳에 야학을 만들고 노동법 등을 가르쳤다"며 "당시 야학은 제도권 교육보다는 노동자 의식화에 힘썼다"고 전했다.

하지만 구로공단의 야학은 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화복 원장은 이에 대한 주요 이유로 '인건비, 시설비 등의 증가로 인한 공장들의 이전', '일반 시민들의 교육기회 확대', '노동 운동의 성격 변화' 등을 거론했다.

실제로 구로공단 내 공장들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접어들며 급격한 인건비 상승과 3D 업종 기피 현상으로 지방이나 해외 이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야학의 대상인 노동자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공교육의 보편화로 야학을 필요로 하는 대상자들도 감소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