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우리동네 이야기 25] 50년 역사의 항동어린이집_ 초대원장 전영희

2015-05-03     박주환 기자

구립 항동어린이집의 김순자원장은 항동어린이집이 구로구내 어린이집들 중 남산어린이집(고척동 소재)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갖는 어린이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항동보금자리 개발로 오는 7월이면 30여년만에 이전하게 되는 항동어린이집. 그 역사는 항동마을의 역사이며, 지역보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오늘 <구로타임즈 우리동네 이야기>가 지역보육사의 한 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주>


◇농촌 아이들위해 탁아소 설립 =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도시 속 시골 항동엔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헌신했던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은 외지에서 김해김씨 집안으로 시집온 며느리였지만, 소외된 지역 아이들을 긍휼히 여겨 사랑으로 돌봤다. 선생의 이름은 전영희라 하며, 지금의 구립 항동어린이집의 초대 원장이다.

항동어린이집은 1961년 농번기 탁아소로 시작했다. 당시 오류2동 일대에서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농번기가 찾아오면 일손이 모자라 어른들은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전 선생은 "항동은 서울이라고 하지만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마을이라 어른들은 농사철만 되면 밥만 한 술 뜨고 논밭으로 나가고 없었다"며 "부모 대신 집을 지키는 아이들과 벌거벗고 싸우다 울며 추녀 밑에서 잠들기도 하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이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말한 적 있다.

현 항동 어린이집의 김순자 2대 원장은 항동 김해김씨 집안으로 전영희 선생과는 가까운 친척이기도 한데 "무척이나 심성이 곱고 따뜻한 분으로 기억한다"며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셨고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김 원장은 또 전영희 선생의 어머니가 한국 유아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이영보 선생이라는 말도 전했다. 이영보 선생은 1906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8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을 유아교육을 위해 몸 바쳤던 인물. 당시엔 드물게 동경 소화보육학교로 유학을 다녀왔고 이후 숭의여자전문대학, 중앙대학교 등에서 보육학을 가르쳐 후학을 양성했다. 학계나 관계자들은 이영보 선생을 한국에 유아교육의 씨를 뿌린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항동 종갓집 며느리로 첫 인연 =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난 전영희 선생이 항동과 인연을 맺게 된 건 1949년의 일이다. 당시 선생은 항동에서 30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살아온 김해김씨 집안과 혼인하면서 종갓집의 며느리로 들어왔다. 6칸 대청마루, 시누이 8명과 함께하는 시골생활은 서툴고 힘들 수밖에 없었지만 자상한 남편의 위로가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결혼 후 9년, 선생의 나이 30살 무렵. 낚시를 하던 남편이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 사망하고 만다. 슬하엔 7살짜리 딸, 5살 아들 그리고 뱃속의 아이가 있었다. 전 선생의 상심은 매우 컸다. "눈앞이 캄캄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어버릴 정도"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힘든 시간을 지혜롭게 견뎌낸 전 선생은 지역사회 활동에 오히려 더 힘을 쏟기 시작했다. 유복녀가 3살이 되던 해에는 항동 생활개선 구락부(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의 회장을 맡고 농촌청년단체인 4-H 구락부 자원 지도자 직책을 맡았다. 마을 청소년들과 함께 초가삼간 마을회간을 짓고 야간 학교를 통해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전 선생이 농번기 탁아소를 설치한 것도 이 즈음. 농촌지도소로부터 권유를 받아 1961년 5월 5일 마을 유지들과 함께 개소했다.  탁아소를 한창 운영해오던 어느 날엔 장마철 폭풍우가 몰아쳐 벽돌이 무너져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아이들을 종갓집의 사랑방과 마당으로 데려와 돌봤다.
 
◇개발로 오는 7월 경 이전 = 항동어린이집이 현재 위치(항동 171-1)에 문을 연 것은 1982년 6월 29일이다. 그 전엔 일본 대사관에서 일하며 7년 간 해외에 체류한 후 1978년부터 다시 항동교회서 농번기 탁아소를 열었다.

그동안 며느리의 활동에 반대를 해오던 시아버지는 현재 부지 일대의 100여 평 땅을 서울시에 기부하면서 어린이집의 공간을 마련해줬다. 부지엔 3층짜리 건물이 세워졌고 1층은 노인정, 2층은 유아원, 3층은 마을회관으로 사용했다.

김순자 원장은 1978년부터 전 선생과 함께 유아보육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 원장이 술회한 이 시절의 이야기 또한 고난의 연속이다. 어린이집 운영 자체도 쉽지 않았지만 특히 장마철이면 창틈으로 빗물이 몰아쳐 전 선생과 함께 정리하며 보낸 시간이 한 세월이라 했다. 또 당시엔 멀리서도 아이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고 인원 제한도 없어 늘 일손이 바빴다고 말한다.

이후 1997년 경 전 선생은 어머니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개원한 영보유치원의 원장을 전임하기로 결정하면서 인천으로 부임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2009년 경. 82세이던 때였다.

오는 7월 무렵이면 항동 어린이집은 항동 그린빌라 맞은편으로 거처를 옮긴다. 현재의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어린이집을 손수 이끌어 온 김순자 원장은 못내 아쉬운 눈치다

김 원장은 "전영희 원장과 함께 만들고 일궈왔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돼 무척이나 섭섭한 마음이지만 이전할 장소를 물심양면으로 알아봐 준 지역주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며 "새로 들어서는 어린이집 일부엔 공공주택개발로 사라지는 마을의 역사와 예전 어린이집의 흔적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김 원장은 더불어 항동 어린이집이 장소를 옮기고, 본인이 원장을 그만둘 때라도 전영희 선생의 뜻은 항동 마을에서 계속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좋은 집안 출신인 전영희 원장의 따뜻한 마음과 희생으로 지역에 탁아소가 만들어졌고 어린이집이 만들어졌어요. 아이들을 위한 전 원장의 교육정신과 돌봄에 대한 실천이 계승되길 바라요. 앞으로도 지역의 유아교육에 헌신한 인물이 이런 뜻을 이어 항동 어린이집의 새로운 원장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