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우리동네이야기 15] 오류동 주막거리객사, 조선 최초의 급행료 '원조'

1883년 인천항 개항이후 번성

2014-11-08     박주환 기자
오류동 주막거리객사가 있던 자리.

오류시장이 번창하고, 오류역 앞에 여관들이 몰려들기 훨씬 오래 전인 근대기부터 오류동은 상인과 행인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오류동 120번지 동부제강 사거리 일대. 지금은 오류고가차도로 인해 둘로 나뉘고 삼성디지털 플라자와 식당이 들어서 있는 곳이지만, 옛 사람들은 이곳을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라고 불렀다.

이곳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부터다. 인천으로 입항한 청나라 사신은 물론 물건을 팔러 이동하는 상인, 공문서를 전달하는 파발꾼들도 이 길을 통해 서울로 향해야 했다.

서울과 인천 간의 거리는 약 1백리, 40km 정도다. 아침에 떠나면 저녁 때쯤 서울에 도착할 수 있어 점심 무렵엔 오류골 주막거리에 도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부분은 주막거리에서 식사를 한 후 서울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하룻밤을 묵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경인로의 폭은 2m 정도였는데 수레는 다닐 수 없었고 말을 주요 이동수단으로 사용했다. 말의 사용료는 2원 50전, 가마는 3원 72전, 짐을 싣는 말 한 마리는 1원 8전이었다는 전언이다.

사신이나 관리들이 이용했던 객사 주변에는 주막이 수 십 채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쉬어가는 길에 의도치 않게 노잣돈을 많이 쓴 사람들이 적지 않아 "오류주모에게 간 씹혔구나"라는 말도 있었다 한다.

1934년도 동아일보에 실린 소설 '흑두건'에는 인천에서『제물포에서 서울로 향하야 오십리 오류동 주막거리 어느 술청앞에 …… 술청으로 들어서며 "여보 주민마나님 막걸리 좀 거르고 술국 좀 어서 뜨우"…….』라는 대목을 통해 제물포에서 서울로 향하는 1백리 중 정확히 오십리가 오류동 주막거리였음을 알 수 있고, 막거리와 술국을 시켜 먹는 일상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류골 주막거리는 말을 타고 달리는 파발꾼들에게도 쉬이 지나칠 수 없었던 곳인가 보다.

오류동 등 향토사를 잘 아는 지역출신 서울동작교육청의 박국천 행정관리국장은 "한성과 제물포의 중간이다 보니 주막거리 기생들한테 빠지면 파발꾼들의 파발이 늦어지곤 해 파발들을 띄울 때 1원일 걸 두배로 2원을 줬는데 이를 오류쩐이라고 불렀다"며 "이 요금이 조선 최초의 급행료였다"고 설명했다.

박 국장은 또 "오류동이 이렇게 보여도 부자들이 굉장히 많았던 곳인데 대부분 오류골 주막거리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오류골 주막거리는 1893년 경 경인로가 확장되면서 수레 운영이 가능해져 더욱 번성하는 듯 했으나 1899년 경인철도과 함께 인근의 간이역이 사라지고 현 오류역이 들어서면서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곳이 주먹거리객사였다는 사실을 적은 표지석, 이른바 유허비만은 경인로변에 남아있다고 하지만 이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구청 관계자를 통해서도 정확한 위치를 전해들을 순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