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4주년 특집기획] 탄생 50주년 구로공단의 어제와 오늘

인물로 살펴본 '구로동맹파업'

2014-03-17     신승헌 기자

창간14주년 특집호(2014. 3. 10일자)에 게재된 <기획_ 탄생 50주년 구로공단의 어제와 오늘>기사 중 지면부족으로 인해 빠졌던 < 인물로 살펴본 '구로동맹파업'>편 기사를 싣습니다.   <편집자 주>

 


1985년 여름, 구로공단 내 대표적 노조였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김준용 위원장 등에 대한 정부의 구속조치가 발단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민주노조 탄압에 대해 '구속자석방', '노조운동탄압저지' 등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연대투쟁으로 맞선 '구로동맹파업' 한 가운데에는 구로삶터지역자활센터 윤혜련 센터장도 있었다.

 

"공단에서 일 한 지 6년째가 되던 1979년도에 노조가입을 권유받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저는 단춧구멍 뚫는 일을 했었는데 하기 싫은 잔업을 늘 해야만 했죠. 미싱기사로 일하시던 분이 저를 불러 '근로기준법'이란 걸 설명해주며 힘을 합치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죠."

윤 센터장은 "작은 정어리들은 큰 물고기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무리를 짓는다"고 말하던 미싱기사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난 1985년도에 윤 센터장은 가리봉전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대우어패럴, 선일섬유 등이 연대를 하며 구로공단 내에서 근로자 권리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임금투쟁지원 등 연대활동을 강화한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인 85년 6월 22일에 김준용 씨와 강명자 씨, 추재숙 씨 등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명이 구속됐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마음으로 동맹파업에 참가했습니다."

대우어패럴·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노조는 김준용 씨 등이 구속된 다음날인 1985년 6월 23일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노조간부에 대한 구속을 '민주노조탄압의 신호탄'으로 인식, 동맹파업을 결정했다.

다음날인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것을 신호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는데 25일에는 남성전기·롬 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참여 노조원은 약 2천 5백 명에 달했다.

"제가 근무하던 가리봉전자는 총 3곳(독산, 구로, 가리봉)에 공장이 있었어요. 가리봉전자 노조는 독산과 구로공장 식당을 점거하고 '구속자를 석방하라, 노조탄압 중지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 나중에는 '전두환 정권 물러나라'는 퇴진운동까지 벌였죠."

"점거라고 했지만 사실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단전, 단수가 이뤄진 상태에서 전경들이 건물을 둘러쌌거든요. 야간학교에 나간 동료들은 다시 들어오지도 못했죠. 그래도 인근 건물에서 다른 회사 노조원들이 투쟁하는 목소리는 들렸습니다. 그 힘으로 버텼죠."

비가 오던 날에는 밖에서 일부러 슬픈 가락의 노래를 틀어놓기도 했고, 농성장을 찾은 엄마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간 여공도 있었다고 윤 센터장은 회고했다. 구로동맹파업은 마지막까지 농성을 벌이던 대우어패럴이 29일 강제해산 되면서 끝이 났다.

"파업이 끝난 직후부터 관리자들은 생산현장에서 각목을 들고 다니며 일을 시켰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출근투쟁에 나섰죠."

출근투쟁을 시작한지 4일 정도 지났을 때 가리봉전자 노조위원장이 구속됐다. 가리봉오거리에서 20여 명과 연좌투쟁을 벌이던 윤혜련 센터장도 서울대 출신 노조원 2명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교도관들이 반성문을 쓰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갈 수 있다고 회유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가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아서 거부했죠."

이 사건으로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에서 8일 간 유치된 윤 센터장은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돼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고 석방될 때까지 만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에게는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공무집행방해', '회사업무방해' 등의 죄목이 붙었다.

한편 구로동맹파업은 약 1,200명에 달하는 노조간부와 핵심조합원들이 해고되는 등 후폭풍도 거셌지만,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탄생시키고 변혁지향적 노동운동을 출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