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_구로공단 50주년 어제와 오늘1]구로공단 50년, 지역의 역사와 보물로

1.대한민국 산업단지의 역사를 열다

2014-03-11     신승헌 기자
▲ 50년전 구로공단의 모습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이하 구로공단)가 올해로 탄생 50주년을 맞았다.

수출진흥과 공업기반 마련을 위해 1964년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되고 같은 해 구로동 일대 198만 2천㎡가 수출산업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우리나라 산업단지 사(史)는 시작됐다. 구로공단은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의 토대가 전무하던 우리나라에서 계획입지로는 처음으로 조성된 공단이다.

1967년 4월에 1단지 준공과 더불어 구로공단에는 싸니전기 등 15개사가 입주를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는 고용인원 6천명을 목표로 했지만 그 해 구로공단 근로자수는 2천여 명이었다. 하지만 3단지 준공 직후인 1971년에 100개사가 입주하였고 구로공단은 이후 수출기지로서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이어왔다.

수출용 공산품 생산만 이루어지던 공단에는 원자재가 무관세로 들어왔다. 정부는 무관세 원자재의 국내시장 유통을 막기 위해 공단전체를 군부대처럼 철조망 등으로 둘러싸기도 했다.

 # 90년대 위기에서 재활력으로
70, 80년대 구로공단은 '수출 한국'을 이끈 끌차 구실을 했다. 섬유, 봉제, 전자부품산업이 주종을 이루던 구로공단은 1977년에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규모의 10%를 담당하기도 했다. 

성장을 이어가던 구로공단이 공동화의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노동운동의 중심무대가 되고, 임금상승현상으로 기업들의 해외이전이 확대되면서 수출은 1990년대 들어 40억8,800만불(1990년)에서 21억500만불(1998년)로 떨어졌고, 같은 기간 고용은 5만5,694명에서 2만5,126명으로 줄었다.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한계에 봉착한 것도 구로공단 위기에 한 몫 했다.

구로공단은 정부와 한국산업단지공단 등이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을 수립한 시기인 1997년부터 다시 활력을 찾았다. 이때부터 지식산업센터(구 아파트형공장)가 대거 건립되었고, 전통 제조업 중심의 공단은 첨단 신산업 중심으로 업종을 고도화해 나갔다. 여기에 당시 정부가 수도권 공장총량제에서 산업단지를 제외하면서 공단의 재도약은 급물살을 탔다. 입주기업과 고용인원은 98년도를 기점으로 지난해까지 매년 늘어났다.

구로공단은 지난 2000년 12월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변경되고, 1967년 준공과 함께 입주한 싸니전기가 2003년 공단을 떠나면서 실질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성 당시 3.3㎡ 당 5,500원이었던 1공단 평균분양가는 싸니전기 매각 당시 3.3㎡ 당 787만 5천 원으로 약 1,430배가 올랐다.

오늘날의 구로디지털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