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_구로공단 50주년] 2. 서민의 땀과 눈물 서린 구로공단

2014-03-11     신승헌 기자

1970년대, 약 11만 명이 종사하고 수출의 10%를 담당했던 구로공단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주춧돌이었다. 하지만 번영의 이면엔 억압과 희생을 감내하며 살아온 농민과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도 켜켜이 쌓여있다. 산업화와 민주화, 7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이 두 갈래 물줄기가 만나고 뒤엉킨 지점이 바로 구로공단인 것이다.
  
지난달 20일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강민구)는 백 모씨 등 29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등기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지연 이자를 포함해 약 1,137억 원을 보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단일 국가 배상 사건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 배상금이다.

박정희 정권은 지난 1961년 구로공단을 조성한다며 구로동 일대(99만㎡)에 토지를 강제수용 했다.
 

강탈한 토지 위에 세워진 구로공단

이 일대에는 농지개혁으로 적법하게 토지를 물려받은 농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정부가 판잣집을 철거하는 등 토지를 강제 수용해 공단을 조성한 것이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1967년 3월 소송을 냈다. 같은 해 12월 1심은 적법하게 농지가 분배된 사실이 인정된다며 농민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69년 항소심은 절차 문제를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했지만 대법원은 다시 1심과 같이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 환송, 농민들이 땅을 돌려받을 길이 열렸다.

하지만 공안당국이 사기 등의 혐의가 있다며 농민들을 상대로 수사에 나서면서 소송의 양상은 달라졌다. 공안당국은 70년 여름 농민들을 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해 사나흘씩 강압 수사를 벌였다. 당시 검찰은 "감옥 갈래, 소송 포기할래"라며 농민을 협박했고, 이에 농민들 대부분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소를 취하했다. 끝까지 저항한 41명은 사기 및 공문서 위조 등 혐의로 기소돼 2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 규명을 결정하고 다시 민사소송을 열어달라고 신청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70, 80년대 구로공단 거리 곳곳에 붙은 모집공고 벽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문구는 '18세 미만의 용모 단정한 여성'이었다.

당시 근로기준법은 18세 이상이 되어야 부모의 동의 없이 취업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18세 이상'이나 '부모의 동의'보다 중요한 요건은 '18세 미만'이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80년대 초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서혜경 씨는 두 살 어린 친동생의 이름으로 취업을 하기도 했다.


이름뿐인 근로기준법 그리고 노동권 탄압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72년, 당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윤혜련 씨는 까치발을 들고 구로산업수출1공단에 위치한 '삼경복장'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 때 "16살"이라고 나이를 두 살 속였지만 어리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취직한 여공들은 보통 밤 9시에서 10시가 되어야 퇴근을 했다. 출근한 아침에 식권을 두 개 받으면 철야근무(새벽 2시~3시)를 하라는 의미였다. 회사는 '절도 예방'이 목적이라며 여공들이 퇴근할 때 정문 수위실에서 몸수색을 했고, 폭언은 물론 폭행을 저지르는 것도 다반사였다.

부당함을 강요받는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79년 결성된 삼경복장 노동조합의 경우 1년도 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노조간부들이 공안당국으로 잡혀가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작아졌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에도 노조활동에 대한 정부와 사측의 방해는 계속됐다. 속칭 '유화정책시기'였던 이때는 드러나는 억압보다 드러나지 않는 방해가 이어졌다.

노조결성 사실을 구청에 신고하면 구청공무원이 해당 회사에 이를 알리고, 회사가 관리자를 통해 '어용노조'를 먼저 접수하는 식이다. 당시 복수노조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조합 결성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유니전자' 노동자들의 조합결성 시도가 이 같은 방법으로 좌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