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의 추억, 항동의 유산3]항골마을공동체 뿌리, 항동산신제

2013-12-02     구로타임즈 기획취재팀
▲ 항동산신제를 올리던 웃당골 중턱에 세워져있던 터줏가리. 산신제가 열리던 2000년대 중반 본지가 촬영했던 사진이다. 지금은 이같은 흔적조차 없어 찾기 어렵다.

항동에 새로 들어선 푸른수목원을 지나 새로 개통된 계수대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수백년 역사와 전통의 항동 안쪽마을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

김해김씨 김녕군파 영견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자리를 잡은 이후 후손의 후손으로 이어져 11대가 살아오고  있는 곳.

전주이씨와 순흥안씨도 들어와  정착하면서  항동은 거센 도시화 물결속에서도  구로지역의 몇 안되는 유서 깊은 집성촌을  유지해왔다.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와 타지인들의 이주속에서도  오랜 마을공동체로서의 결속을 유지 할수 있었던 데는 오랜 세월 항동의  전통으로 내려온 산신제도 한몫을 했다.

" 마을에 처음 이사 왔을 때도 산신제는 마을에서하고 있었어. 1년에 한 번씩 10월 달에 산신제를 지냈지. 동네사람 전체가 다 돈을 걷었어. 걷은 돈으로 돼지잡고 떡하고 과일을 사고 했거든.  산에서 고사를 지내고 내려와 음식들을  50집이면 50집으로 다 나눴어. 이름 부르면 이름대로 타가 집에 가서 먹었지."

순흥안씨가  항동마을에 살기 시작한지 100년 정도 됐다는  안차랑(72)어르신은  아현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3,4학년 때 항동으로 이사와서 부터 지켜 봐 온 마을 산신제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항동에서 집성촌을 이룬 3개 성씨 집안은 마을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기도 하고 특히 마을의 오랜 전통인  산신제 제주를 매년 돌아가면서 맡아 유사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산신제는  굴봉의 서쪽 기슭에 있는 항동의 웃당골(서낭고개)  중턱인 항동산 38-1번지에 신목인 전나무가 세워져 있는 곳을 제당으로 하여 매년 10월 초이튿날에서 초사흗날 사이에 좋은 날을 정해, 올렸다.

     " 호환막기 위해 시작"

"예전에 산세가 심해  호랑이가 (지금의 김영봉)노인회장네 앞에 나타나곤 했고 호굴도 있어서 호환 일으키지 말라고 산신제를 지내게 된거야". 김해김씨 집안의 10대손인 김영서(62)어르신이 들려주는 산신제 유래다. 

가정과 마을의 무사평온을 비는 마음을 담은 항동산신제는 그래서 산신제를 주관하는 제주를  선임하는 조건부터 엄격하고 까다롭게 진행됐다.

 "한 해동안 집안에 장례나 입원 등 불상사가  전혀 없었던 집 가운데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으로 정해졌다"고 유재억(66) 어르신은 설명했다.

이는 산신제에 들어갈 음식을 장만하는 집인 당주를 선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다만 당주의 경우는 나이와 관계없이 마을에서 돌아가며 맡았다.

제주로 선임되면 산신제가 있기 삼일 전에 제단을 만들어놓고 주위를 깨끗이 청소한 후 황토를 펴고  솔가지를 매단 새끼금줄을 쳐놓아 부정타지 않도록 했다.

 또 제주 자신도 일주일전부터 목욕재개하고 고기음식류도 금하며 상인은 물론 병자도 만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삼가했다.

산신제에 사용하기 위해  제사 하루 전날에는 인근 산 아래에 있는 뒷골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동네 젊은 청년들이 우물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청소를 한 뒤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뚜껑을 덮어놓고 다음날 산제사 지내러 갈 때 제일먼저 양푼에 떠 날라 정한수로  내놓았다고.

모든 것을 조심하는 것은 제주 뿐만 아니었다.  마을사람들도 산신제일이 정해지거나 당일이면  마을과 가정에 부정타지 않도록 엄격하게 지켜야 할 것들이 적지 않았다.

"부정 탄다고 빨래 널면 안되고" "돈도 출납하지 않고, 쌀도 꿔주지 않고" "제를 지내기 전에 굴뚝에서 연기나면 안된다고 해 저녁을 오후5시쯤 일찍 해먹기도 했다"는 마을 어르신들의 경험담은 산신제에 담은 동네기원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산신제 당일.  제주와 함께 7-8명의 젊은 청년들은 지게 등에 통돼지 한마리, 떡 한가마니 등 60여 가구가 나중에 먹을 분량의  밥, 나물, 떡, 과일, 술, 그릇 등을 지고 산으로 오른다.

수십년 전만 해도 산신제에 오르는 인원은 제주와 음식관계하는 사람들 20여명 정도. 부녀자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주가 자정에 산신제문을 낭독하면서 제사를 지낸다. 이 때  주민들의 건강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집집마다 'ㅇㅇㅇ씨 건강하시고'라며  소지를 올려 빈다. 

제사를 지낸 후 마을주민들은 제사비 지급 및 산제상황보고 후 다음해 제사비와 준비상황을 논의해 결정한 뒤 음식을 제사비를 냈던 집집마다 똑같이 나누어주었다.
   
 "명절보다 더 좋은 날 "

"산신제 지내는 날 밤은 명절보다 더 좋은 날 이었지. 명절이나 돼야 국 끓여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를  삶은 돼지고기로 한두근씩 푸짐하게 먹던 날이니 말이야. 산신제에서 제를 지낸 음식은 집집마다 똑같이 나눠주었거든. 내장도 손질해서 각 집마다 똑같이 나눠주었어". 산신제가 끝난 뒤 음식을 나눠주므로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이날 밤 심야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가 음식을 받아와 신나는 축제의 장을 열었던 것.

많은 도시민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던 시절, 가정과  마을을 지키는 항동마을 전통에 뜻을 함께 한 주민들은 돈이 없으면 쌀로도 마음을 함께 모으기도 했다고 유재억 어르신은 전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돈이 없으면  쌀로 3,4되씩 냈어. 형편이 되면 더 내고. 80년대 이후부터는 가구별로 5천원원 이상, 90년대 들어 1만원씩 추렴해왔어. 하지만 1만원씩 내서는 안되고 동네에서 여유있는 분들이  좀 더 내주고, 마을 공동으로 모아놓은 돈을 써서 산신제를 올렸지".

오랜 전통의 항동산신제는 그러나  젊은 인구가 교통이나 아이들교육, 기타 주거환경불편 등으로 인해 마을에서 타지역으로 빠져나가면서 '차례상' 수준으로 명맥만 유지해오다, 3년여 전부터 마을에 있는 절 '해은사'에서 진행하고 있다.

제사물품을 지고 올라가야 할 젊은 사람도 없는데다, 이 곳이 항동보금자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절 스님에게 의뢰하게 됐다.

이후 매년 10월초순쯤 사람들이 많이 참석할수 있는 주말을 정해 동네분들 40-50명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절에서 지내면서 예전과 달라진 점중 하나는 여성분들도 참석할수 있다는 것.

유서 깊은 항동의 이같은 전통은  한때 무형문화제로 전승하기 위한 동네 주민들의 활동으로 이어졌으나, 실질적 결과물에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서울정도 600돌에 즈음한 1993년 10월17일 항동의 당시 김광태 노인회장을 비롯 김학배, 안기남, 김광홍씨가 제관이 되어 지낸 산신제가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에 보도된 바 있다.

음력설인 1994년 2월에는 김광태 노인회장과 김정진 당시 오류2동장이 'KBS한밤에 만난 사람'에 출연, 항골 산제에 얽힌 유래에 대해 40분간 대담한 내용이 방송된 바도 있다.

    ' 94년에 멈춰 선 시계
   무형문화재의 꿈

실제로 중앙일보 1993년 11월18일자 신문은  '항동주민 산신제'라는 제목의 사진기사에서 도포 등으로 의관을 갖춘 5명의 제관이 산신제를 지내는 장면과 함께  "서울시 구로구항동 주민20여 명이 17일 오후 5시 이 마을 굴봉산 서낭고개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수백년 계속돼온 이 산신제는 11월 중 길일을 택해 이 마을주민들을 주축으로 치러진다"는 사진설명을 달아 보도한 바 있다.

언론을 통해 대외적으로 알려지던 항동산신제는 이후 더 이상의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김해김씨 집안이던 당시  김광태 노인회장이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의 추진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신제를 올리던 굴봉산 서낭고개에는 지금, 전나무나 터줏가리도 없다.  전나무는 이미 오래 전에,  햇짚으로 주저리를 만들어 입힌 1m 높이의 터줏가리는 만들어놓으면 누군가 없애버리곤 해 이후부터 아예 놓아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산신제를 올린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산신제를 함께 했던 추억을 가진 어르신들사이에서도  더 이제 더 이상 볼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소리가 적지 않다. 

■기획취재팀 _ 김경숙· 윤용훈· 박주환· 신승헌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