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3주년 특집 기획]IN구로마을이야기 3_천왕이펜하우스 3단지

필요하면 '나누기' 모자라면 '더하기'

2013-03-13     송희정 기자

재작년 말 인구 1만2천여 명의 새로운 마을 하나가 탄생했다. 집들이가 끝난 게 작년 초쯤이니까 아이로 치면 이제 막 첫돌을 지난 셈이다.

오류2동 맨 끝자락에 자리한 천왕이펜하우스. 이제 막 삶터의 형태를 갖춘 신생아파트단지지만 작년 한해 이곳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 이웃 간 따스한 온기가 심상찮다.

작은도서관, 주민카페, 풍물패 등 주민 스스로 만들고 운영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는 한 손에 꼽기에도 모자를 정도다. 이들 공동체 중심에 천왕이펜하우스 3단지가 있다. 재능기부와 마을자원 발굴을 통해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일구고 있는 천왕이펜하우스 3단지를  지난 3일 찾았다.
 
 ■ 작은 간담회 주최로 얻은 자신감
3단지 주민들이 처음으로 일을 낸 건 작년 5월 지역 국회의원을 초대해 마련한 주민간담회자리였다. 3,500세대 대단위 단지에 비해 보육·교육시설 등이 턱 없이 부족한 현실을 알리고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 3단지 53통 박승준 통장과 주민들이 합심해 벌인 일이었다.

간담회는 80여명의 학부모들이 몰렸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행정기관의 손을 빌지 않고 주민 의지로 멍석을 깐 이 일을 계기로 주민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홍진숙 씨는 작년 10월 개관한 3단지 작은도서관의 운영위원장직을 맡았다. 홍 위원장은 "우리는 그동안 권리만 주장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나가면서 주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며 "평소 자원봉사라고는 해 본 일이 없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작은도서관 자원봉사자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 작은도서관 중심 재능기부 '활짝'
작년 10월 약 3개월여의 오랜 고생 끝에 3단지 관리소 1층에 '작은 도서관'이 문을 열자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엄마들의 즐거운 수다가 단지 안에 깨소금같이 쏟아졌다.

현재는 20명의 엄마봉사자들이 매주 1시간씩 돌아가며 운영을 맡는다. 봉사시간을 1시간으로 정한 이유는 자녀를 돌봐야하는 엄마에게 '부담'을 줘서는 절대 행복한 봉사가 될 수 없다는 운영진의 철학 때문이다.

마을의 아이와 엄마를 잇는 하나의 거점공간이 생기자 주민들이 하고팠던 다른 일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술술 풀려나갔다. 3단지에 거주하는 네 아이의 엄마인 김정금 씨가 재능기부자로 나선 가운데 구연동화프로그램이 매주 화요일 진행됐다. 지난 2월부터는 매주 토요일 박승준 통장의 딸 박빛나(23) 씨 재능기부로 단지 내 예비중학생들을 위한 영어수업이 개설됐다.
 
 ■ 주민카페 생기니 바리스타가 '짜잔~'
하나의 커뮤니티공간을 일군 주민들은 또 다른 공간을 찾아 나섰다. 그때 눈에 들어온 곳이 천왕초 뒤편 천왕산 자락에 자리한 바로 흥왕교회다. 오며가며 눈도장을 찍어둔 박승준 통장이 직접 나섰고, 교회 1층 로비에 주민카페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이성규 담임목사는 흔쾌히 허락했다. '천왕 사랑의 카페'는 그렇게 탄생했다.

마을에 주민카페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자 6단지에 사는 김성우 씨가 박 통장을 직접 찾아왔다. 수년간 취미로 즐긴 홈로스팅을 이웃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김 씨는 작년 11월부터 한달에 1~2차례 일일 바리스타로 나서 주민들과 커피를 나누고 있다.

김성우 씨는 "차 한 잔만 나눠도 이웃 간 금 새 친해지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며 "봄부터는 커피학교도 개설하고 자원봉사도 모집해 엄마들이 아이들 학교 보내고 오순도순 차 한 잔 나눌 수 있도록 카페운영을 상설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 아이와 재잘재잘 발 뻗고 영화보기
올 1월에는 작은도서관 엄마봉사자들이 일을 냈다. 아이들과 주말을 보내야하는 엄마아빠들의 고민을 풀어주고자 아파트단지 내 무료영화상영을 기획한 것. 100여명이 들어갈 넓은 공간은 에델마을 측에 도움을 구해 해결했다.  입주민을 위한 '메리다와 마법의 숲' 무료영화상영은 지난 1월 20일 에델홀에서 첫선을 보였다.

무료영화상영은 2월에도 있어었다. 이성희 영화제추진위원은 "남편이 주말에도 일을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영화제를 기획하게 됐다"며 "한 달에 한 번 아이들과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속닥속닥 말하면서 영화를 보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고 말했다.

■ 천사패·천왕090 부부가 함께
천왕이펜하우스에는 올 1월과 2월 연달아 '천사패'와 '천왕090깔끔이봉사단(이하 천왕090)'이 결성됐다. 천사패는 '천왕 주니어&성인 사물놀이패'의 준말로 최근 구로구청 주말동아리사업에 공모해 지원 대상에 선정됐다.

천왕090은 깨끗하고 쾌적한 마을 만들기를 통해 0세부터 90세까지 정겨운 이웃이 되는 천왕마을이 되자는 뜻으로 지난 2월 23일 관의 도움 없이 주민 스스로 결성한 봉사단체다. 사실 천사패 단장인 이소라 씨와 천왕090의 단장인 임문태 씨는 부부다. 이소라 단장은 서울시 국악단 재능 나눔에 참여한 계기로, 임문태 단장은 오류2동 자율방범대 활동을 계기로 각각 동아리와 봉사단의 중책을 맡았다.

임문태 단장은 "어릴 때 자라면서 봤던 더불어 배려하는 마을을 내 아이들에게 말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여기 오니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 데다 지금은 아내도 동화돼서 함께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사재아빠의 천왕FC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모임은 천왕주니어FC다. 일명 '사재아빠(승재,은재,윤재,효재)'로 불리는 장동호 씨가 작년 5월에 결성한 부모와 함께하는 어린이축구단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함께하는데 현재 20가족이 참여하고 있다. 봄에는 남부수자원생태공원 풋살구장에서 연습을 하다 지표면이 인조잔디가 지글지글 끓던 여름에는 천왕초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그러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똘망똘망 눈빛을 빛내는 아이들을 차마 돌려보내지 못해 장동호 씨 집에서 즉석 영화상영회를 벌이곤 했다. 스무 명 넘는 개구쟁이들이 한바탕 쓸고 간 집안이 멀쩡했을 리 없는데 장동호 씨는 껄껄껄 웃는다.

그는 "거제 녹산마을이 고향인데 지금도 면민체육대회를 하면 마을이 죄다 모여 한바탕 신나게 공차고 놀 정도로 정감이 넘친다"면서 "살고픈 마을은 길을 걸을 때 마주치는 아이가 누구 집 아이인지 알고 '누구야, 어디 가니?'라고 인사 건넬 수 있는,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돼 주는 그런 마을"이라고 말했다.
 
 ■ 스스로 찾고 엮고 잇고
천왕이펜하우스 3단지에서 시작돼 지금은 전 단지 주민들이 함께하고 있는 이들 커뮤니티는 행정기관이나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도움 없이 주민 스스로 일궈낸 것들이다.

천사패와 천왕주니어FC는 구청으로부터 소액 예산지원을 받기는 하지만 동아리활동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큰 부문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천왕주니어FC의 경우 지난해 구청으로부터 100여만원을 지원 받았는데 절반만 쓰고 나머지는 반납했을 정도다.

이 마을은 모자란 것이 있으면 나에게 남는 것을 더하고, 누군가 애타게 구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는 아파트 공동기금을 축내지 않아도, 행정기관의 예산을 따오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웃의 반짝이는 재능과 남이 안 쓰는 공간을 콕콕 찾아내는 밝은 눈과 이들을 적재적소에 엮고 꿰고 이어주는 바지런함만 있으면 충분했다.


천사패 이소라 단장은 "이곳에 이사 오고 나서는 나에게 없던 재능도 새롭게 생기는 것 같았다"며 "우리 활동이 모든 단지 안에 널리 퍼져서 자신도 몰랐던 재능도 찾고 그 재능을 이웃과 나누는 새로운 이웃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