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8 10:19 (목)
[[기고]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기리며
상태바
[[기고]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기리며
  • 구로타임즈
  • 승인 2010.04.01 13: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희 범 서울남부보훈지청 지청장




올해로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았다.

1909년 10월 26일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안 의사는 144일 동안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서른 두 살의 짧고 뜨거운 삶이었다.  

안 의사의 의거는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하고 피지배국의 설움을 삭히고자 했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만방에 천명한 기념비적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던 아시아 대륙은 물론 전 세계에 커다란 반행(伴行)을 불러 일으켰다.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쏘아올린 6발의 총성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을 거쳐 나라가 망국의 낭떠러지에 몰려 있을 때 이 민족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신호였다. 중국이나 러시아 역시 작은 나라 조선에서 이런 의거를 감행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경이를 표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순국 100주기에 되새겨 보는 안 의사의 삶과 정신은 후세인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안 의사는 나의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 안 의사는 동양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회의 조직, 공동은행 설립, 공동화폐 발행, 공동군 설립까지 구상했다. 동양 평화를 모색한 국제평화주의자로서 ‘열린 민족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안 의사가 주창한 동북아 평화와 공동체 정신은 1세기가 흐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100년전 이미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상하고 실천방법까지 제시했던 것이다. 특히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일본이 보수 강경파 득세로 갈수록 우경화하고, 중국이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시점에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살아있는 가르침이다. ‘하얼빈의 총소리가 평화의 총소리’인 이유다.  

형장으로 떠나기 전 안 의사는 ‘爲國獻身 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란 글을 남겼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자 자기를 희생하면서 독립을 성취하려고 혼신을 다한 것이 안 의사의 삶이었다. 나라가 안팎으로 위기를 맞은 지금, 안 의사의 숭고한 삶과 정신에 비추어 국민 각자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가장 큰 과제는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여러 차례 발굴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6월에는 남북한 공동으로 감옥 뒤편 야산 일대를 가장 유력한 매장지로 추정하고 발굴을 추진한 바 있다.

문제는 일제가 안 의사의 시신을 뤼순 감옥 뒤쪽 야산에 매장했는지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안 의사의 시신을 화장했거나 의외의 장소에 매장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가 한 세기 전 목숨 바쳐 염원한 평화는 어느 독립운동가만의 소망이 아닌,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다.

독립을 찾은 조국 땅에 묻히기를 염원했던 안 의사의 유해를  하루 속히 찾아내 봉환할 수 있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