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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62]신도림동 양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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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62]신도림동 양마장
  • 김윤영
  • 승인 2007.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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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초 많아 말 기르던 곳

100여년 전 만하더라도 말은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이자 갓이나 관모(冠帽)를 만드는 재료 또는 비료·종이·연료·약의 원료 등 다방면으로 사용되었던 까닭에 항상 수요가 많았던 동물이다. 지금이야 제주도 관광의 코스 중 하나로만 인식될 정도로 말의 용도는 거의 없어졌지만 말이다.

특히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는 말의 수요가 많았다. 앞서 설명했듯 유용한 교통수단이자 전시(戰時)에는 도전마(戰馬)로, 말갈기와 말총은 갓이나 관모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말 가죽은 고급 가죽으로 신발 등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마분(馬奮)은 비료·종이·연료·약의 원료로도 사용되는 등 항상 수요가 많았다. 특히 고려 말과 조선초에는 중국에서 말의 진상을 요구해 와 고려 공민왕 23년(1374)부터 조선 세종9년(1427)까지 53년 동안 1만여 필의 말이 중국에 보내졌고, 조선 초에는 한 번에 1만여 필의 말을 바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 초에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곳이 성동구 마장동, 양천구 목동.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동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장동은 조선시대에는 양마장, 1960년대에는 가축시장이 들어서면서 더 유명한 곳. 그리고 목동은 조선시대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던 곳이다.

구로구에도 그런 곳이 있다. 오늘날의 모습으로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곳인 신도림동이 바로 그곳이다.

신도림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에 속해 있었는데 도야미리(道也味里), 원지목리(遠芝牧里) 등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지목리는 현재 도림천 근처로 소와 말을 길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따라 도림천을 마장천(馬場川)이라고도 불렀다. 옛날 마장천 근처에 풀이 많아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초기부터 말은 그 수요가 많았던 까닭에 서울동쪽 살곶이벌(箭串坪)에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어서 전국적으로 많은 마장(馬場)을 설치함에 따라 이곳에도 마장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신도림동의 김승민(53)씨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등 지금의 신도림동의 모습을 갖춘지는 오래되지 않았다며 70, 80년대는 아파트 대신 공장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이전시대에는 침수지대로 무성한 목초가 조성되어 있는 늪지대 였다”며 “신도림동에 양마장이 있었다면 이러한 신도림동의 지형적 조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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