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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149]가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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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이야기 149]가을이 오면
  • 성태숙 시민기자
  • 승인 2016.10.01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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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바지를 꺼내 입었다 도로 반바지를 집어 들었다. 길게 입고 다니자면 아직은 덥고, 짧고 입고 설치기엔 어설픈 날씨가 살짝 고민이다. 그래도 아직 한낮 더위가 제대로 가시지 않은 것이 지난 여름이 어땠는지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경고처럼 느껴져 뒷목이 서늘하다.

어지간하면 더운 철 더운 것이고, 추운 철 추운 것이다 하고 내색 않고 지내고 싶었지만 정말 지난 여름은 너무 더웠다. 아무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저 덥지 않은 구석이 있을까 그것만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니 뭘 어떻게 하고 지나갔는지조차 가물거릴 만큼 한 계절을 그냥 흘려보내 버렸다. 지난 계절이 지독했던 것은 특히 밤낮없이 울어대던 매미 떼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더욱 실감이 난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새벽녘에 들려오는 다른 풀벌레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서늘한 가을이 온다고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가 정말 때로는 위안이 되었다. 그리곤 어느 순간 정말 계절이 바뀌었다.

그런데 사실 그저 이것을 풀벌레 소리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홀로 방안에 있을 때면 어디선가 울고 있는 저것의 이름을 알아서 제대로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한여름을 너에게 기대어 버텼고 적막한 방안에서 때로는 네 소리를 간간이 기다리기도 했노라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이름도 모르는 한심한 처지인 것이다.

어쩜 세상을 그렇게 살아온 탓인지 모르겠다. 저런 게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냐고, 머리 위에 하늘이 어디로 도망을 갈 것이며, 발밑에 땅이 어디로 사라지겠느냐고 어린애 같은 배짱만 부리면서 살아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 변함없이 봄 되면 제비, 나비들이 날아들고, 가을이면 고추잠자리 한가롭게 하늘을 수놓는 그런 세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줄 알았다. 이곳 구로동에서도 말이다.

그런데 어느 새 아이들을 낳아서 한참 기를 때 어린 것들에게 세상을 일러 준다며 저건 나비다, 저건 잠자리야 하던 기억을 새삼스럽게 떠올려야 할 만큼 구로동이 변해버렸다. 아이들도 모두 아직 채 제 앞가림을 못하고 있는데, 어느 새 제비와 나비들은 아이들 곁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잠자리 한 마리를 보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곤 어디선가 조금씩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소리까지 들려오니 더더욱 마음이 심란스럽다. 세상 틀림없을 줄 알고 구로동 한 귀퉁이에 22층이나 되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니 기가 막힌 기분이다. 아직은 저 아래 지방의 일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있지만 영 개운치는 않은 느낌이다.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땅이란 땅은 다 덮어버리고 하늘이란 하늘은 빌딩숲으로 모두 가릴 기세로 여태 살아온 우리말이다. 개구리와 제비와 나비와 잠자리가 "너랑은 함께 못 살겠다, 얘" 하며 떠나버린 우리말이다.

물론 작은 징조로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나비나 제비도 당장 여기서 보기 어렵다는 것뿐이지 다른 곳에 가면 지천으로 날아다니니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고, 지진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 때가서 대비를 잘하자 하면 그만이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과학적으로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철에 적응하느라 약간의 계절성 우울을 앓는 탓이라고 적절한 설명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다 좋다. 하지만 대로는 세상의 변화가 좀 감내할 만한 것이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램이 든다. 내 사는 곳에서는 벌써 제비를 볼 수 없는, 이제는 나비나 잠자리조차 구경하기 힘든 세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일은 도무지 반갑질 않다. 가을을 온통 홀로 맞이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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