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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우리동네이야기 4]근현대사의 아픔 간직한 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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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우리동네이야기 4]근현대사의 아픔 간직한 응골
  • 박주환 기자
  • 승인 2014.04.18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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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부터 '실미도 사형집행'까지

어렵고 힘들었던 한국의 근현대사 그때 그 시절. 지난하지 않았던 곳 어디 있겠는가만은 현 오류2동(과거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의 응골은 특히 애환의 골이 깊다.

'엉굴' 또는 '엉꿀'이라 불리기도 했던 이 마을 이름의 의미는 산기슭 어둡고 깊숙한 곳에 자리 한다는 뜻이다.

응골로 이사와 낳은 아들이 벌써 60세를 넘겼다는 최동순(88) 할머니의 의하면 당시 오류애육원을 중심으로 이곳엔 단 세집밖에 없었다. 그 마저도 전부 판자로 지은 허름한 집이었고 그 외엔 전부 논밭이었다.

최 할머니는 "우리 바깥양반이 산꼭대기 아래의 방하나 부엌하나 있던 무허가 집을 4만 5천 원에 사면서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며 "그 때도 그렇고 이후에도 그렇고 응골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회상했다.

오류애육원엔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모여 살기도 했다. 애육원의 설립자는 송석도 씨로 송 씨는 당시 오류동 일대에서 소작농으로 시작해 농장과 농사학원 등을 운영하다가 6.25전쟁 발발 후 부모를 잃은 아동들이 늘어나자 사재로 애육원을 지었다.

마을 주민들은 애육원을 거쳐 간 많은 아동들이 이제는 노년에 접어 들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건용(73, 남) 어르신은 "양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애육원에서 많이 생활했다"며 "지금은 모두 지난 이야기로 매년 5월쯤이면 애육원 출신들의 도움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마을 행사도 열린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영화로 유명해진 실미도 북파공작대원들 중 사로잡힌 일부가 사형당한 곳도 응골이었다. 당시 대원들은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던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스스로 수류탄을 터트려 대부분 사망했지만 4명은 생존했다.

생존자 4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곳이 바로 개웅산에 있던 공군부대였다. 이들은 사형직후 가족에게 인도되지 못한 채 암매장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4명의 유해발굴 작업을 실시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 1구만 수습했다.

이처럼 녹록치 않은 근현대사를 버텨나가던 와중, 응골에도 한 때는 개발의 꿈에 대한 바람이 불었더랬다. 한국전쟁이후 주둔해 오던 공군부대가 떠나면서 이 부지에 지역에 필요한 문화복지 시설이나 아파트가 들어설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바람은 인근의 한 교회가 해당 부지 198,678㎡를 매입하면서 무산됐다. 당시 주민들은 이에 반발해 크게 항의했지만 힘없는 일반인들의 목소리만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어려웠다는 전언이다.

이후 이곳 가장자리엔 아파트 몇 채가 건립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단독주택과 연립 밀집지역으로 남아있다.

응골에서 20년 이상 소매점을 운영해 온 한 상인은 처음 들어올 때와 지금의 모습에 큰 변화가 없다고 했다.

이 상인은 "단층이었던 집들이 2~3층으로 올라선 곳들은 좀 있지만 전체적으로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라며 "오히려 요즘엔 원래 살던 사람들은 떠나고 중국동포 등 새로운 빈곤층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최동순 할머니도 "옛날처럼이야 사는 게 힘들겠냐만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이 동네다"라며 "할머니 할아버지 중 절반 이상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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