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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항동의 추억 항동의 유산 1] 개발로 사라지는 350년 삶의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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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항동의 추억 항동의 유산 1] 개발로 사라지는 350년 삶의 터전
  • 구로타임즈 기획취재팀
  • 승인 2013.11.1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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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같은 지형에서 유래…천혜적인 자연 보고 뒤안길로

항동.  지난6월 초 개장한 서울유일의 푸른수목원으로 지금은 대중적 지명도를 가져가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만해도 구로구에 살고 있는 주민들 상당수가  잘 모르던 마을이름이다. 하지만 350년의 오랜 역사속에 마을주민들이 제에 올릴 돼지를 지고 올라가 산신제도 지내고 대보름날이면 척사대회도 갖던 정감 넘치던 '마을' 그 자체였던 곳. 이제 수백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항동의 안쪽마을이 항동보금자리주택 건설사업으로 사라지게 된다. 개발이란 미명하에 사라져갈 항동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기록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본다.  _ 편집자 주_

 

     기획 연재  순서

 1. 서막, 항동의 유래와 변천
 2. 항동사람, 평생을 살다 1
 3. 항동사람, 평생을 살다 2

 4. 항동사람, 오늘을 살다
 5. 항동마을  문화생태지도
 6. 항동의 꿈, 항동의 기록

 

 

금가고 있는 '삶의 터전'

35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항동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민들의 마음은 이미 항동을 떠나 있었다. 9대에 걸쳐 살아왔든, 4대, 5대 전 선조가 터를 잡아왔던 곳이든 상관없었다. 공간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개발보상지연에 따른 삶의 고통이 더욱 컸다. 

주민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주민들은 2004년만 해도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맹렬히 저항했다.

정부는 당시 항동 197번지 일대 7만4000평 규모의 부지에 임대주택 2000호를 포함, 총3000호의 주택조성계획을 추진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대규모 주택단지가 건설되면 전통과 문화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삶의 토대가 뒤엎어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이 같은 반대는 일면 당연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2010년 정부가 보금자리주택단지 조성 계획을 들고 나왔을 때도 같은 이유로 사업에 반대했다. 수백 년, 수십 년 동안 이 곳에 터를 잡아왔던 원주민들은 적어도 오랜 역사에 걸쳐 지켜온 생활 터전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및 대책이라도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대책은커녕 SH공사의 부실로 개발보상마저 지연되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주민들의 고통은 커져만 갔다. 3년은사람의 마음이 지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항동을 찾은 지난 9월 말 동네에서 만난 김정웅(70) 어르신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70년째 한 곳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해 왔지만 하루빨리 마을을 떠나고 싶은 것이 어르신의 속내였다.

김 어르신은 "주변 주민들 대부분 이 상태로는 답답하니 개발 하려면 빨리 하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며 "토박이들은 입주권을 갖고 있어도 내 고장이라는 느낌이 없고 굳이 머물 이유가 없어 다들 안 들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 어르신에겐 사라질 마을에 대한 추억보다는 지지부진한 보상에 대한  답답함이 어느새 더 커져버린 듯했다. 하지만 김 어르신이 "20년 전만해도 산신제가 열리면 음식을 만들어 다들 나눠먹고 할 정도로 마을의 유대가 강했는데 지금은 인심이 사납다"며 남긴  말 속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었다.


마을에서 슈퍼를 20년 가까이 해왔다는 박정자(66) 어르신도 비슷한 입장을 내비쳤다. "나갈 집이다 생각하니까 안정이 안 되고 불편하기만 해. 이곳에서 키운 딸들 이제는 다 시집가고 좋은 기억도 없지 않지만, 여기서 나가면 깨끗한 곳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

박 어르신의 개미슈퍼는 항동 푸른수목원을 조금 지나 항동보금자리로 개발될 안쪽마을의 6614번 버스정류장 이름(슈퍼앞)이 될 정도로 마을에서는 유명한 곳이다. 박 어르신은 30대 중반 무렵 항동의 토박이인 남편과 결혼하며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주민 상당수의 마음이 진즉 떠나버린 마을 항동. 이미 마을을 떠나버린 사람들도 숱했다. 9대째 이곳을 지켜온 그 많던 김해 김씨 가문도 이제는 10집 내외밖에 안 남았다. 내년 토지보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토박이들 대부분은 이곳을 떠날 예정이다. 격동의 산업화 시대에서도 서울에서 농촌의 모습을 유지하며 제 모습을 지켜왔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나면 그 기억 역시 오래지 않아 잊힐 것이다.
 
 '배의 모양' 지형서 유래

항동(航洞)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형태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의 모양을 닮아 항동이라 부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항동이라는 이름에 航(배 항)자를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아서 원래는 巷(거리 항)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항동 등 오류동 일대의 지역사를 다룬「향토사수탄」의 저자 김정진은 '마을(村)은 골목으로 항행(巷行)하는 것'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말을 인용하며 마찬가지로 항동도 마을로 다닌다는 뜻의 항(巷)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짚어내고 있다.

이밖에 실제로 이곳에 배가 드나들어 항동이라 불렸다는 견해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천왕동의 너부대내와 인천 소래 인접 지역의 낮은 곳이 해발 10m가량 밖에 되지 않아 바닷물의 유입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는 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경기도에서 서울시로
항동의 본래 이름은 항리다. 그 이름이 항동이 된 것은 1963년 1월 1일. 본래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항리였던 것이 그 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로 편입되며 항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갖게 됐다.

당시는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며 시흥·김포·부천군을 포함한 5개 군, 11개 면, 84개 리 등 많은 지역들이 서울시로 재배정되던 때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공포한 대통령령(제9630호)에 의거해 구로구가 신설되며 영등포구의 관할에서 벗어났는데, 1975년부터 오류2동사무소 소속이었던 항동은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개청함에 따라 행정동으로는 오류2동, 법정동으로는 구로구 항동의 지위를 갖게 된다.
 
항동이 항리였던 시절의 기록을 되짚어보면 조선 태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은 그 초기엔 고려의 행정구획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1413년(태종 13년) 태종이 전국토를 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강원·함길·평안 등 팔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군·현을 설치하는 팔도제를 실시했다. 이때 현재 경기도 부천지역을 관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부평도호부도 새롭게 설치가 됐고 항리는 바로 이 행정구역에 속했다.

항리는 이로부터 500년 가까이 부평도호부 관할이었으나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에 의해 지방행정구역이 8도 23부 337군으로 개편되면서 이듬해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옥산면 항리가 된다.

이후엔 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항리가 됐다가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항리가 됐고 1941년 10월 1일부터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에 속하는 순으로 행정구역이 변천해 왔다.

현재는 북쪽으로는 오류동, 동쪽으로는 천왕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시흥시, 서쪽으로는 부천시와 경계를 두고 인접해 있다.      ■ 기획취재팀 : 김경숙·박주환·윤용훈·신승헌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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